최강 공비 이영회의 최후 -3-
전쟁이 끝나고 북으로부터의 지원은 기대할 수가 없는 상황에 군경의 토벌은 더욱 가중되어 보급 투쟁이라고 부르는 식량 도둑질도 이제 한계에 달했다.
경찰의 매복 기술은 일취월장하여 공비부대가 보급투쟁을 나가면 갈 때나 올 때 매복한 경찰에게 걸려 피해를 볼 확률도 대폭 늘어났다. 좋았던 시절,먹을 것 많은 큰 동네나 지서들이 주요 목표가 되었었지만 전 지역 지서가 중무장한 요새화를 완료되었으니 이것도 옛 이야기가 되었다.
전쟁전 지서당 단 10여명의 지서원들은 공비의 발호가 극심하자 100여명으로 증원되었고 각 지서는 이런 보루까지 갖춘 중무장의 철벽 요새가 되었다.
이영회는 아직도 지리산 잔존 공비 부대중의 최대 부대인 60명 정도의 부하들을 이끌고 있었으나 이들도 이탈자가 자주 발생하고 사망자도 늘어나서 부대가 얼마나 계속 생존할 수 있을지 몰랐다.
더구나 겨울이 오고 있었다. 식량등의 보급품을 충분히 준비해놓는 월동 준비가 절실하였다. 그의 사부였던 이 현상도 사살된 마당에 이영회는 살기 위해 이판사판으로 발악을 했다.
즉 대담하게도 지리산에서 아주 먼 경북 의령읍을 기습하여 경찰서를 비롯해서 읍내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식량과 일용품을 강탈할 계획이었다. 그는 전 부대원을 동원하고 나름 치밀하게 습격 계획을 짰다,
동원된 이영회 부대원은 여자 공비 2명 포함을 포함해서 총 61명이었고 이중 의령 경찰서 습격에 직접 가담한 공비 대원들은 33명이었다.
지리산에서 산청군과 진양군을 가로 질러 먼 의령 경찰서까지의 거리는 아주 멀다.
장거리의 침투와 탈출이 필요한 결정이었는데 이것은 경찰의 추격과 매복에 많은 기회를 주는 장시간의 노출을 감수해야하는 취약점이 있었다. 이미 실전의 반복 경험을 통해 통과지점 예측과 매복의 기술이 정점에 달한 경찰의 매복술을 감안하면 이영회의 작전은 전멸을 각오한 무모한 계획이라 하겠다.
이영회 부대는 1953년 11월 21일 03시 30분경, 지리산 세석평전의 아지트를 떠나서 산청군 송계와 진양군 집현, 설매실 뒷산을 거쳐 이틀 뒤인 11월 23일 오후 2시 30분경 화정과 칠곡의 경계 지점인 붙티재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그들은 모두 국군 복장으로 위장하였다. 대장 이영회는 국군 대위 복장을 하여 지휘관으로 가장하였다.
그는 발빠른 3명을 뽑아 정탐꾼으로 미리 의령으로 잠입시켰다. 이들이 출발한 뒤에 나머지 부대원들은 진주와 의령 사이 국도변에 다시 잠복하였다.
두 시간 못 되어 고구마 50여 가마와 민간인 6명을 태우고 현역 군인 한 명이 운전하는 GMC 트럭을 탈취하여 고구마를 모두 내리고 군인은 납치하고 계속 잠복하였다.
국군 GMC는 아주 튼튼해서 현재도 산판에서 사용되고 있다.
약 10분후에 의령에서 진주로 가는 민간인 트럭이 오자 이를 정지시켜 탈취하고 승차 중이던 현역 헌병을 납치하였다. 두 명의 국군과 두 대의 트럭을 납치한 공비들은 모두 여기에 승차하고 16시 30분경 납치 장소를 떠나 의령읍으로 향하였다. 이들은 칠곡 삼거리, 운암 가례를 거쳐 읍내로 들어서며 미리 보낸 염탐꾼을 합류하였다.
17:05경, 육군 GMC의 운전석에 납치한 헌병과 여자를 편승시킨 공비들은 의령 경찰서 정문에서 육군 대위로 가장한 이영회의 구령에 따라 전원 하차함과 동시에 입초 순경의 총기를 빼앗고 경찰서 안으로 몰려들며 일제히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불의의 습격에 당황한 경찰은 제대로 응전 태세도 취하지 못한 채 피하기에 급급하였다. 이때 의령 경찰서장 박영동 서장은 경찰서 건물 신축 관계로 상담차 내방한 지방 유지 백진환씨와 지역 자유당 간부 이영희씨를 만나고 있었다.
바깥이 소란스럽고 총성이 울리자 박서장은 창문을 열고 ‘상이군인이 왔나--?’ 하고 중얼거리며 내다보았다.
순간 그는 공비들의 사격을 받고 절명하고 말았다.
당시 국가로부터 충분한 지원도 받지 못하고 생계도 막막했던 상이군경들 중 일부가 작당하여 거리를 돌아다니며 행패를 부리는 경우가 있었다.
서장실을 몰려 든 공비들은 서장의 갑작스런 순직으로 넋이 나간 두 사람에게“ 무엇하는 사람이오?” 하고 물었다. 두 사람은 벌벌 떨면서 친척되는 사람이 산림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있어 선처를 부탁하고 있던 참이라고 둘러댔다.
공비들은 참말이냐고 묻자 한 사람이 얼른 안주머니에서 있던 돈뭉치[1만원]를 내보였다. 공비들은 그 돈과 시계를 빼앗고는 얼른 나가라고 소리치며 두 사람을 밖으로 내쫓았다. 두 사람은 정신없이 도망쳤다.
공비들은 유치장을 부수고 갇혀있던 범죄자 [병역 기피자 6명]을 풀어주었다. 이어서 경찰서 건물에 불을 질렀다. 이영회 부대는 의령읍의 습격을 경찰관서 하나로 국한하지 않았다. 그들은 의령읍의 주요 시설들을 모두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공비들은 관공서부터 공격했다. 의령 군청, 우체국, 전매서, 금융조합, 의령 면사무소들을 모두 약탈하고 방화했다. 의령면의 호적부도 이때 불에 탔으며 의령 정미소와 양곡 창고가 불길에 휩싸였다. 경찰서 불이 인근 민가로 번져 육골쪽 민가 40채가 불타고 버스 차부(車部-터미날)의 일부도 불탔다.
삽시간에 주요 시설들이 불길에 싸이자 놀란 일부 주민들은 황급히 무동 구시골, 덕실 쪽으로 피난을 나서기도 하였다. 공비들이 의령 시내를 분탕질하고 초토화시키는 만행은 길게 이어져 완전히 어두워지는 야간이 될 때까지 거의 두 시간이나 계속되어 의령읍내를 화재와 파괴의 수라장으로 만들었다.<계속>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