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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 공비 이영회의 최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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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 공비 이영회의 최후 -3-



전쟁이 끝나고 북으로부터의 지원은 기대할 수가 없는 상황에 군경의 토벌은 더욱 가중되어 보급 투쟁이라고 부르는 식량 도둑질도 이제 한계에 달했다.


경찰의 매복 기술은 일취월장하여 공비부대가 보급투쟁을 나가면 갈 때나 올 때 매복한 경찰에게 걸려 피해를 볼 확률도 대폭 늘어났다. 좋았던 시절,먹을 것 많은 큰 동네나 지서들이 주요 목표가 되었었지만 전 지역 지서가 중무장한 요새화를 완료되었으니 이것도 옛 이야기가 되었다.


전쟁전 지서당 단 10여명의 지서원들은 공비의 발호가 극심하자 100여명으로 증원되었고 각 지서는 이런 보루까지 갖춘 중무장의 철벽 요새가 되었다.


이영회는 아직도 지리산 잔존 공비 부대중의 최대 부대인 60명 정도의 부하들을 이끌고 있었으나 이들도 이탈자가 자주 발생하고 사망자도 늘어나서 부대가 얼마나 계속 생존할 수 있을지 몰랐다.


더구나 겨울이 오고 있었다. 식량등의 보급품을 충분히 준비해놓는 월동 준비가 절실하였다. 그의 사부였던 이 현상도 사살된 마당에 이영회는 살기 위해 이판사판으로 발악을 했다. 


즉 대담하게도 지리산에서 아주 먼 경북 의령읍을 기습하여 경찰서를 비롯해서 읍내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식량과 일용품을 강탈할 계획이었다. 그는 전 부대원을 동원하고 나름 치밀하게 습격 계획을 짰다,


동원된 이영회 부대원은 여자 공비 2명 포함을 포함해서 총 61명이었고 이중 의령 경찰서 습격에 직접 가담한 공비 대원들은 33명이었다.


지리산에서 산청군과 진양군을 가로 질러 먼 의령 경찰서까지의 거리는 아주 멀다.


장거리의 침투와 탈출이 필요한 결정이었는데 이것은 경찰의 추격과 매복에 많은 기회를 주는 장시간의 노출을 감수해야하는 취약점이 있었다. 이미 실전의 반복 경험을 통해 통과지점 예측과 매복의 기술이 정점에 달한 경찰의 매복술을 감안하면 이영회의 작전은 전멸을 각오한 무모한 계획이라 하겠다.


이영회 부대는 1953년 11월 21일 03시 30분경, 지리산 세석평전의 아지트를 떠나서 산청군 송계와 진양군 집현, 설매실 뒷산을 거쳐 이틀 뒤인 11월 23일 오후 2시 30분경 화정과 칠곡의 경계 지점인 붙티재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그들은 모두 국군 복장으로 위장하였다. 대장 이영회는 국군 대위 복장을 하여 지휘관으로 가장하였다.

그는 발빠른 3명을 뽑아 정탐꾼으로 미리 의령으로 잠입시켰다. 이들이 출발한 뒤에 나머지 부대원들은 진주와 의령 사이 국도변에 다시 잠복하였다.


두 시간 못 되어 고구마 50여 가마와 민간인 6명을 태우고 현역 군인 한 명이 운전하는 GMC 트럭을 탈취하여 고구마를 모두 내리고 군인은 납치하고 계속 잠복하였다.


국군 GMC는 아주 튼튼해서 현재도 산판에서 사용되고 있다.


약 10분후에 의령에서 진주로 가는 민간인 트럭이 오자 이를 정지시켜 탈취하고 승차 중이던 현역 헌병을 납치하였다. 두 명의 국군과 두 대의 트럭을 납치한 공비들은 모두 여기에 승차하고 16시 30분경 납치 장소를 떠나 의령읍으로 향하였다. 이들은 칠곡 삼거리, 운암 가례를 거쳐 읍내로 들어서며 미리 보낸 염탐꾼을 합류하였다. 


17:05경, 육군 GMC의 운전석에 납치한 헌병과 여자를 편승시킨 공비들은 의령 경찰서 정문에서 육군 대위로 가장한 이영회의 구령에 따라 전원 하차함과 동시에 입초 순경의 총기를 빼앗고 경찰서 안으로 몰려들며 일제히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불의의 습격에 당황한 경찰은 제대로 응전 태세도 취하지 못한 채 피하기에 급급하였다. 이때 의령 경찰서장 박영동 서장은 경찰서 건물 신축 관계로 상담차 내방한 지방 유지 백진환씨와 지역 자유당 간부 이영희씨를 만나고 있었다.


바깥이 소란스럽고 총성이 울리자 박서장은 창문을 열고 ‘상이군인이 왔나--?’ 하고 중얼거리며 내다보았다.

순간 그는 공비들의 사격을 받고 절명하고 말았다.


당시 국가로부터 충분한 지원도 받지 못하고 생계도 막막했던 상이군경들 중 일부가 작당하여 거리를 돌아다니며 행패를 부리는 경우가 있었다.


서장실을 몰려 든 공비들은 서장의 갑작스런 순직으로 넋이 나간 두 사람에게“ 무엇하는 사람이오?” 하고 물었다. 두 사람은 벌벌 떨면서 친척되는 사람이 산림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있어 선처를 부탁하고 있던 참이라고 둘러댔다.


공비들은 참말이냐고 묻자 한 사람이 얼른 안주머니에서 있던 돈뭉치[1만원]를 내보였다. 공비들은 그 돈과 시계를 빼앗고는 얼른 나가라고 소리치며 두 사람을 밖으로 내쫓았다. 두 사람은 정신없이 도망쳤다.


공비들은 유치장을 부수고 갇혀있던 범죄자 [병역 기피자 6명]을 풀어주었다. 이어서 경찰서 건물에 불을 질렀다. 이영회 부대는 의령읍의 습격을 경찰관서 하나로 국한하지 않았다. 그들은 의령읍의 주요 시설들을 모두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공비들은 관공서부터 공격했다. 의령 군청, 우체국, 전매서, 금융조합, 의령 면사무소들을 모두 약탈하고 방화했다. 의령면의 호적부도 이때 불에 탔으며 의령 정미소와 양곡 창고가 불길에 휩싸였다. 경찰서 불이 인근 민가로 번져 육골쪽 민가 40채가 불타고 버스 차부(車部-터미날)의 일부도 불탔다.


삽시간에 주요 시설들이 불길에 싸이자 놀란 일부 주민들은 황급히 무동 구시골, 덕실 쪽으로 피난을 나서기도 하였다. 공비들이 의령 시내를 분탕질하고 초토화시키는 만행은 길게 이어져 완전히 어두워지는 야간이 될 때까지 거의 두 시간이나 계속되어 의령읍내를 화재와 파괴의 수라장으로 만들었다.<계속>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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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승계 받은 후계자들 [ 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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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승계 받은 후계자들 [ 上 ]



현재 한국 공군의 차세대 주력기로 도입 예정 된 F-35는 흔히 합동타격기(JSF)로 불린다. 개발국인 미국에서 공군, 해군, 해병대의 차세대 전술기를 하나의 플랫폼을 기반으로 만들기로 하면서 붙여진 명칭이다. 그런데 2006년 시제품이 출고되면서 Lightning II라는 정식 이름을 부여받았는데, 이는 F-35의 개발자인 룩히드마틴社가 제2차 대전 당시에 만든 P-38에게 붙여졌던 Lightning의 이름을 승계한 것이다.



[ P-38 Lightning ]


개발자인 록히드마틴은 물론 이를 도입하기로 예정 된 관련 당국자들은 F-35가 전 세대에 활약한 P-38을 능가하는 무기사의 명품이 되기를 희망하겠지만, 아직도 개발 단계에 있고 실전에 투입된 이력이 없기에 과연 P-38을 능가하는 명성을 역사에 남길지는 물음표라 할 수 있다. 사실 모든 무기의 명성은 실제 운용 결과로부터 나온다. 즉, Lighting의 명성이 계속 이어질지는 전적으로 F-35하기 나름이라 할 수 있다.



[ F-35 Lightning II ]


이와 같이 무기의 이름을 명명하는데 있어 이전에 사용하던 이름을 다시 사용하는 것은 그만큼 그 이름이 가지고 있는 명성이 좋아 그 영광을 또 다시 재현하고자 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도대로 청출어람(靑出於藍)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반면 이름값도 제대로 못하고 사라져간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미국 전투기에는 F-35처럼 이름을 승계한 후계자들이 이전에도 많았는데 Thunderbolt도 그 중 하나다.



[ P-47 Thunderbolt ]


아무리 때려도 끄덕하지 않는 강한 맷집과 둔중한 모양에 걸맞지 않는 급강하 능력으로 전투를 벌이던 독일 조종사들의 기를 질리게 만들었던 유명한 전투기가 리퍼블릭社의 P-47 Thunderbolt다. P-47은 제2차 대전 당시 유럽 하늘에서 폭격기들의 든든한 호위전투기로 그 명성을 떨쳤지만 더 빠르고 더 멀리 비행이 가능한 P-51이 등장한 이후부터는 대지공격으로 주 임무를 바꾸었다.



[ Thunderbolt로 불리는 P-47과 A-10 ]


이후 강력한 방어력을 방패삼아 독일 지상군에게 천둥번개를 내리 꽂아 무서운 하늘의 악마로 이름을 더욱 드높였다. 페어차일드 리퍼블릭社가 CAS 임무를 위해 개발한 A-10에게 Thunderbolt II로 이름을 승계시킨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였고, A-10은 선배인 P-47 못지않은 대지공격 능력을 선보여 명성을 이어갔다. 특히 1991년 걸프전 결과는 도태를 예정하고 있던 A-10의 수명 연장 프로그램을 실시하도록 만들었다.



[ A-10 Thunderbolt II ]


Corsair 또한 성공한 전작의 명성을 이어받은 이름이다. 역사상 최강의 항공모함 탑재용 프로펠러 전투기로 평가되는 보우트社의 F4U Corsair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에게는 한마디로 죽음의 사신이었다. 전쟁 초기에 하늘의 왕자인 것으로 착각하던 일본의 제로기들은 역 갈매기 날개를 지닌 F4U와 조우하면 어떻게 도망가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우선 걱정할 정도였다.



[ F4U Corsair ]


F4U는 제트시대가 도래해서도 한 동안 현역으로 남아 한국전쟁과 같이 실전에서 종횡무진 활약하였다. 이전과 달리 공대공 전투가 아닌 든든한 무장 탑재량을 이용한 항공모함 탑재 대지상공격기로 그 임무를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미 공군(육군항공대)은 모든 전술기를 일거에 제트기로 교체하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F4U의 성능이 상대적으로 뛰어남을 유추할 수 있다.



[ 항모탑재 전투기로 개발 된 F8U(F-8) ]


제트시대 도래 후 보우트가 만든 항모탑재 전투기로 명성을 떨친 것이 F8U Crusader다. F-4 Phantom II이 등장한 이후 주력기에서 내려와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지만 해군 조종사들이 마지막 건파이터로 부를 만큼 사랑하였다. 베트남전쟁 당시에 MiG-17, MiG-21과의 근접 선회전에서 위력을 발휘하였고 라팔 배치 전까지 프랑스 해군이 항공모함에서 사용할 만큼 좋은 전투기였다.



[ F8U를 베이스로 개발된 A-7 Corsair II ]


이러한 F8U를 베이스로 하여 개발 된 대지공격기가 A-7 Corsair II인데 같은 이름으로 먼저 불렸던 F4U가 전투기에서 공격기로 진화한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좁은 항공모함에서 운용하였던 점에서 알 수 있듯이 A-7은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무시무시한 폭장량을 자랑하고 날렵하였다. 한마디로 Corsair의 이름을 물려받아 더욱 빛낸 걸작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고 볼 수 있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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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알아보는 군수] 숫자 15 그리고 24(군수품 현장관리 자동화체계 시범부대, 물류상황실 운영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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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수품 현장관리 자동화체계 추진  

 

슈퍼마켓이나 편의점 계산대에서 보던 바코드 인식기를 이제는 군대 창고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군이 2014년 7월부터 군수품을 바코드 혹은 QR코드(자동인식기술)와 PDA(모바일 단말기)로 관리하는 ‘군수품 현장관리 자동화체계’ 시범사업에 들어간 것입니다.



일단 시범에 돌입한 부대는 모두 15개 부대. 육군 14개 부대와 해군 1개 부대입니다. 시범사업이 성공적으로 완료되면 오는 2015년 7월까지 군수품 현장관리 자동화체계 시스템이 전 군에 확대될 예정입니다. 


바코드와 PDA를 이용하면 군수품 관리에서 어떤 점이 개선될까요? 우선 바코드 인식기로 물품을 파악하면 손으로 기록하거나 전산 입력을 하는 방식보다 입력 오류가 줄어들고, 시간도 절약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인식된 정보는 PDA를 통해 바로 중앙 데이터로 전송되니 물류흐름을 실시간으로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어 관리의 효율성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이죠. 이 같은 시스템이 군수현장에서 진행되는 수입, 검수, 입고, 저장, 색출, 출고 등 모든 창고작업에 적용되면 인력과 비용 모두가 절감되는 효과를 거둘 것입니다.   


재물조사 업무처리의 예를 들어볼까요? 자, 재물조사를 시작합니다. 담당 장병은 사무실로 가서 재물조사 목록을 만들고, 이 조사표를 출력해서 창고로 뛰어갑니다. 창고에서 품목별로 수량을 일일이 눈으로 확인하고, 이를 손으로 기록한 뒤 다시 사무실로 뛰어가 PC에 입력……. 헉헉, 숨이 찰 지경이네요.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기록하다보니 시간도 걸리고, 원하지 않던 실수가 발생하는 것 역시 피할 수 없고요.

 

그런데 자동화를 도입하고 나면 이 복잡한 과정이 단 두 단계로 줄어든답니다. 창고에서 재물조사 목록을 다운로드하고 PDA로 즉석에서 물품을 확인한 뒤 전송하면 끝! 게다가 PDA로 군수품 바코드를 인식하는 것만으로 자료 입력이 완료되니 오류가 생길 일도 없고요. 말 그대로 군수창고가 ‘스마트 창고’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랍니다.  







 24시간 군수 보급 흐름을 통제하는 물류상황실  

 

군에서는 그 어느 부서나 부대든 ‘모두가 쉬는 순간’ 혹은 ‘모두가 자는 시간’이란 없죠. 불철주야로 나라와 국민을 지키는 국군에게도 특히 중요한 24시간 눈을 뜨고 있는 파수꾼이 있습니다. 바로 물류상황실입니다. 


물류상황실은 군수의 보급과 흐름을 통합해서 관리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합니다. 어느 부서에서 어떤 물품의 재고가 어느 정도인지 실시간으로 파악해서 필요할 때 딱 맞춰 보급될 수 있도록 관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2014년 8월 문을 연 물류상황실은 중앙재고 관리로 경제적 군 운영 및 지원속도 향상을 위해 전군자산을 한 화면에서 비교 분석할 수 있는 시스템을 운영하기 위해 대형 모니터 8대와 PC 8대, DVI 매트릭스 1대, 제어프로그램 1개를 구비했습니다. 또한 물류상황실 요원은 각종 정보체계 운용능력을 갖춘 인력으로, 사전 교육을 거쳐 대형 모니터 제어 프로그램이나 입출력장치 등 상황실 구성장비 조작할 능력을 확보했습니다.  


이곳에서 다루는 정보는 국방물자, 장비, 수송, 조달 전 분야를 아우릅니다. 조달청, 방위사업청, 각 부대의 조달 상황과 재고관리, 국방수송체계와 민간 택배사를 통한 수송 과정 등을 추적관리함으로써 보급 업무를 통합하고 야전부대의 창구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죠. 


군은 앞으로도 물류상황실을 계속 업그레이드해서 2018년까지는 군수통합정보체계 구축을 완료하는 시점에 물류상황 COP(전투전초)를 개발하고, 2019년에는 비디오 월까지 설치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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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오비의 군모닝] 133화 총기함 열쇠를 들고 온 철이! 그 사태의 심각함에 대해 설명한다!

최강 공비 이영회의 최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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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 공비 이영회의 최후 -4-


이런 난동의 파괴가 대한민국의 한 도시에서 발생하고 있었을 때 의령 외부에서는 이영회 부대의 습격을 전혀 알지를 못했다. 이영회 부대 일부가 외부 도로를 차단했었기 때문이기도 했었고 외부와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인 전화 교환소가 있던 우체국을 장악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지서원들 - 이들과 의용 경찰이라는 큰 조직이 지서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의령 사건을 보면 이 때로부터 40년 뒤인 1982년 4월 26일, 같은 의령의 궁류면 궁류 지서에 근무하던 순경 우범곤이 술에 취해 무기고에서 칼빈 총과 수류탄을 꺼내 들고 궁류면 4개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 62명을 사살하고 34명을 부상시킨 대살인 사건을 연상케 한다.

 

그는 먼저 우체국부터 습격하여 집배원과 교환원을 사살하고 밤새 궁류면 마을을 돌아다니며 살육을 했었지만 새벽에 수류탄으로 자살할 때까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 아무 제지도 받지 않았었다.



[우순경의 미친 난동에 의령 궁류면에는 줄초상이 있었다.]



이영회가 기습한 이날 조능대 의령 군수는 보건 진료소에서 허벅지에 난 종기의 치료를 받고 잠시 쉬면서 진료소장 김영곤 선생과 환담 중이었었다.

 

대화 중 갑자기 총을 든 군인 복장의 괴한이 뛰어 들어와 다짜고짜 약품을 자루에 챙겨 나가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 챈 두 사람은 뒷문을 통해 몸을 피했다. 그가 군청 군수실에서 근무하던 중 이영회 부대원의 습격을 받았다면 아마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의령을 습격한 공비 부대는 지리산으로 복귀하기 위해서 북으로 우회하는 루트를 택했다. 

동그라미가 복귀하던 공비들이 통과한 지역들]


 

공비들은 19시경 탈취한 트럭에 전원 올라타고 의령을 떠나 용덕 쪽으로 내달았다. 용덕 지서의 지서원들은 의령 읍을 박살낸 공비들이 자기 지서로 오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아채고 모두 도주해버렸다.

 

공비들은 서슴치않고 지서에 불을 지르고 다시 트럭으로 이동하여 원껄을 지나 매새 마을 [산학 부락이라고도 한다] 앞 진동재 고개에 이르렀다. 여기서 운전사가 고의로 했는지 트럭이 낡아서 그랬는지 고장이 나고 말았다.

 

이 때가 22:OO 이었다. 상당한 시간 꾸무럭거리며 자동차를 수리하려고 애를 썼으나 고쳐지지 않았다. 공비들은 할 수 없이 차에 불을 지르고 걷기 시작하였다.

 

공비들은 조용히 정곡면 죽전과 대신 마을을 통과하면서 민가에는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다. 약탈할 것이 많은 정곡면 소재지를 공격 할 계획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이 시각은 이미 이 영회의 의령 습격 사건이 보고가 되어 경찰에 비상이 걸린 상태였다.

 

공비 부대는 정곡면 소재지 못 미처 나직한 산고개에 잠복한 정곡 지서원들의 사격을 받았으나 숫적으로 강한 공비들의 반격에 지서원들은 모두 흩어져서 도주하였다. 공비들은 정곡면 소재지에 난입하여 맨 먼저 정곡 지서에 불을 질렀다. 이 때가 23시 30분이었다.


정곡면 사무소는 미리 알아채고 호적부 등 중요 서류를 물이 없는 배수로에 던져놓고 대피했기에 이 중요 서류들은 무사했었다.

 


오늘날의 정곡 파출소 


지서에 불을 지른 공비들은 면사무소와 금융 조합 건물에 방화하고 주차 중인 트럭 1대를 탈취하여 도주를 계속하였다. 24시 30분경 유곡 송산을 거쳐 01:30경 정곡면 중교 부락에 도달하였다. 공비 일행은 납치한 군인들과 경찰관을 포함 50여 명에 이르렀다.

 

공비들은 이 마을에서 밥을 시켜먹고 이어 04:40 분경 궁류면 벽계리 부근에서 트럭을 버리고 도보로 자굴산 방향으로 향했다. 이 영회는 이곳에서 납치해서 끌고 가던 두 명의 경찰관을 알몸으로 벌거벗겨 놓아주었다.

 

공비 내습의 급보를 받은 경찰은 비상을 걸고 이들의 추격에 나섰다. 동원된 경찰대는 의령 경찰서, 함안서, 진주서, 마산서, 사천서, 고성서, 창녕서등의 경찰대로서 총동원의 비상출동이었다. 육군 보병 56연대도 동원되어 합천 방면에서 차단에 들어갔다. 

 

경찰이 구사한 전술은 [앞서 말한] 이미 경지에 오른 전투 경찰 독자 개발의 ‘매복 전술’이었다.

 

경찰은 이영회의 도주 경로를 미리 예측하고 대의면 모의, 칠곡면 내조, 가례면 갑을,궁유면 정동의 통과 예상 지점에 매복 병력을 완료한 것은 사건 발생 12시간이 지난 새벽이 다 된 후였다. 지역 경찰들이 매복을 완료하고 이어서 동원한 기동 경찰 병력들이 추격하기 위해서 전개하였다.

 

서남 지구 경찰 전투 사령부 소속 150여명과 경남도경 직속 특수부대 70명은 합동으로 한우산, 자굴산 일대의 수색에 들어갔다.공비들은 이 무렵 소부대로 분산되어 도주하고 있었다.그 중 궁유면 벽계의 산성산을 넘어 도주하뎐 공비의 소부대가 제일 먼저 경남 특수 부대인 맹호 부대의 매복에 걸려 섬멸되었다. <계속>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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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짬밥 ( 시간은 흐른다 )

최강 공비 이영회의 최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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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 공비 이영회의 최후 -5-


11월 27일 새벽 2 시경 진양군 미천면 효자동 뒷산을 거쳐 산청군 신등면과 생비량면 경계를 통과하던 이영회 직접 지휘의 소부대는 이곳에 매복했던 서남지구 전투 사령부 2연대 소속 경찰 수색대에 발견되었다.


 [전쟁 후반부 요소요소에 설치 완료 된 초소들 

전투 경찰의 조밀한 초소 배치는 공비들의 활동을 극히 제약했었다.]



매복했었던 요원은 수색대 2소대 1 분대장 김건중 경사와 2 분대장 조옥룡, 양희근 순경등이었다. 첨병이 수하하자 “군인이 무슨 암호야?!”하고 응답하므로 수상히 여긴 매복조들은 즉시 집중 사격을 가했다.


공비들은 사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맹렬하게 저항했으나 이영회를 포함한 9명이 이곳에서 사살되고 총상을 입은 박종상 등 4 명은 생포되었다. 


이영회는 의령 경찰서장 박영동 서장의 가죽 점퍼를 입고 승마 바지와 비슷한 당꼬 바지에 가죽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런 차림에 긴 가죽 장화를 신고 있었다. 공비치고는 상당한 럭셔리 옷차림이었다.


그는 역시 박영동 서장의 소유였던 로렉스 시계를 포함해서 십 여 개의 약탈 시계를 차고 있었다.


이영회 부대의 한 명은 귀순했다고 하는데 전투 전에 귀순했는지 전투 후에 귀순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공비 최강 부대인 이영회 부대는 부대의 중심이던 그가 죽자 허망하게 멸망했다.


이영회가 죽고 남은 잔당들은 부하 이 춘봉이 거두어서 진양군 집현산과 합천군 황매산에 잠입했으나 이미 앞날이 암울한 상황에서 이들 잔당 공비들 사이에 내분이 벌어져 강원영이 이춘봉을 사살하고 잔당을 이끌고 경찰에 자수함으로서 의령 경찰서 피습 8일 만인 12월 1일 새벽에 토벌 작전은 종결되었다.


이 의령 경찰서 습격사견에서 경찰관 5명이 사망하고 경찰관 2명이 중상을 입었고 두 명은 납치되었다가 돌아왔다. 공비들의 피해는 이영회를 비롯한 18명이 사살되고 5명이 생포되었다.


그의 잔당들은 자수하거나 이영호의 후계자로 알려진 서울 공대 출신 노영호를 두목으로 재편되어 공비 활동을 하다가 다음해 산청군 삼장면에서 노영호 이하 모두 사살되었다.


이로서 최강 공비부대 이영회 부대는 영원히 사라졌다. 이영회가 맘먹고 감행했던 의령 경찰서 장거리 기습 사건은 그의 최후와 부대 붕괴로 이어지는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결론이 났다.


앞서 언급한 참전 경찰 경우회 사무총장 김을로씨는 이때 산청 경찰서 사찰계 차석으로 근무하던 중이었다. 그는 이영회 출현 급보를 받자 매복조를 인솔하고 출동하였다.


이영회와 같은 14연대 하사관이었던 공비 두목 송관일을 사살하고 경사로 특진했었던 김을로 씨는 갑자기 출동 명령을 받았는데 내심 이 매복 출동이 너무 싫었었고 공포심이 일었다고 한다. 


이미 가족도 있고 경찰의 출세 가도에 서서 잘 나가고 있던 그는 내면에 있던 이영회 부대에 대한 공포가 살아 나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이영회 부대는 김을로 씨 매복 지점에는 나타나지 않아서 안도했었는데 다음날 산청군 신안면 지서에서 연락이 왔다. 이영회의 사체는 이곳으로 운반되어 왔었다.


그 곳에 근무하는 동료가 빨리 오라고 불렀었다.그는 ‘야! 이영회가 너하고 꼭 같이 닮았다. 한 번 와 봐라.”해서 궁금증에 달려가 보니 지서에 서전사[서남 지구 전투 사령부] 사령관 김종원은 물론 수많은 간부들이 와있었다.


이들이 다 떠난 뒤에 김을로씨는 신안 지서에서 100미터 떨어져 흐르는 경호강을 가로 지르는 긴 다리 입구에 방치 된 이영회의 사체를 보러 갔었다. 이영회는 아직도 박영동 의령 경찰서장의 가죽 점퍼를 입고 있었다. 이영회 사체 얼굴은 출혈을 많이해서 창백했지만 김을로 총장이 보아도 자기 얼굴과 너무 닯았었다고 한다. 


그 뒤에 김을로씨는 동료들로부터 죽은 이영회는 가짜고 진짜 이영회는 김을로라는 가명으로 경찰에 잠입한 것이 틀림없다는 놀림을 내내 받았다고 한다.



[올해 88세의 김을로 총장

자기가 봐도 죽은 이영회와 젊은 시절의 자기 모습은  60-70%쯤 닮아 있었다고 말한다.]



이영회의 또 다른 일화 하나다. 


이현상을 비롯한 공비 두목들이 모두 산중처[山中妻]라는 내연관계의 여자들이 있었는데 이영회에게도 이영순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이태씨는 그의 저서 남부군에서 이 여인에 대한 글을 남겼다. 이영회와 이영순의 애정 행각이 너무 진했던가 주변에서 빈정대는 소리가 있었다.


 그러자 이영회는 슬픈 표정으로 

“내 나이 스물에 입산해서 풍찬 노숙, 사람답게 살아 본 적이 하루도 없다. 앞으로도 나는 이렇게 살다 죽을 것이 뻔하다. 내게도 이 세상에 태어나 서로 사랑한 한 사람의 여인쯤 있어도 좋지 않을까?”

[위 스무 살이라는 말은 거짓이거나 잘못 전해진 것이다.]


이 말은 여러 작가들에게 상당히 감상적으로 들렸던가 ---- 이 글 저 글에 인용한 것이 보인다. 그 이영순 여인에 대한 후기가 남부군과 같이 쌍벽을 이루는 지리산 공비 다큐멘타리의 걸작 ‘ 실록 정순덕’에 나온다.

 

이현상은 휴전 직후 자기 아기를 밴 하수복 이하 간부들의 산중처들을 모두 산을 내려가 귀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현상의 본부인 최문기는 자식들을 데리고 모두 월북했다. 위의 사진은 이현상의 막내딸 이상진으로 북한 외무성 간부였다. 하수복과 사이의 태어난 남한 유복자는 교사가 되었다고 한다.]


30여 명의 여성들과 같이 하산한 이영순은 덕분에 산속에서 죽은 귀신이 되지 않고 오래 살았었다. 1980년대 말에 작가 정충제 씨가 이 사람을 취재하려고 시도했었다. 이영순은 두 명의 자식을 둔 평범한 여성으로 부산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여자 공비 포로들. 카메라를 쏘아보는 선머스마같은 여자 공비에 비해 오른쪽에 만사 체념한 표정의 여자 공비는 이목구비가 제법 단정하다.공비 간부가 눈독을 들일만한 용모다.]



삶의 방편으로 다방 마담을 한다고 했지만 60이 다 된 나이로 고용 마담을 했을리는 없고 생계를 위해 다방을 경영하는 주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녀는 정충제씨의 면담 신청을 한사코 거절해서 정충제씨는 빈손으로 되돌아 와야 했다. 


해방후 전국의 젊은이 사이에 만연되었던 붉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입산 빨치산의 길을 갔다가 전사 등의 불행한 인생으로 끝을 맺은 여성들이 무수히 많았었다.


제주도의 목사 따님으로 간호사가 근무하던 중 입원한 여순 반란사건 괴수 김지회와 사랑하는 관계가 되었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조경순의 인생을 보면 이영순의 삶은 그런대도 행복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녀로부터 한국 역사에 한 악역의 얼룩진 흔적만 남기고 암흑 속으로 사라진 이영회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한 것은 전투 경찰사에 관계하는 나로서는 일말의 유감을 아니 느낄 수가 없었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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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순방] 박 대통령 4개국 순방 일정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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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순방] 박 대통령 4개국 순방 일정 소개



박근혜 대통령은 16~27일 콜롬비아와 페루, 칠레, 브라질 등 중남미 4개국을 공식 방문합니다.  


남미 4개국을 방문하는 박 대통령의 일정표는 정상회담, 동포간담회, 기업 비즈니스 포럼, 문화행사 등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습니다. 9박12일, 말 그대로 ‘강행군’의 연속입니다.

 

중남미는 90년대 이후 상대적으로 안정된 정치적 환경과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아시아와 함께 대표적 신흥시장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이번 순방을 통해 인구 6억명, 총 GDP 5조 7000억달러의 구매력을 갖춘 거대 신흥시장인 중남미 시장과의 연계성을 강화하고, 이를 우리 경제의 활력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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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날 특집] 포병이 이끈 새로운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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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병이 이끈 새로운 문명



한국 경제는 물론 세계 철강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박태준 포스코 명예 회장이 지난 2011년 12월 13일 타개하였을 때 그와 관련한 많은 일화가 언론에 대거 소개되었다. 그중에는 한국 철강 역사를 논할 때 그와 떼어 놓을 수 없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관계도 있었다. 그들은 사제지간으로 처음 인연을 맺었는데 1948년 박회장이 남조선 경비 사관학교 6기생 생도 시절에 대위였던 박대통령이 탄도학 교관이었다.



[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의 영결식 당시 모습 ]


어느 날 수업 시간에 포탄의 탄도 계산 문제를 칠판에 적어 놓고 생도들에게 이를 풀라고 했는데 오로지 박회장만이 이를 일사천리로 풀어내었고 그때부터 박대통령이 그를 눈 여겨 봤다고 한다. 탄도 궤적을 예측하려면 기하학, 미분, 삼각함수 등 각종 수학 원리를 깨닫고 있어야 했다. 따라서 궤적 계산 문제를 쉽게 풀었다는 것은 기초가 튼튼하고 사전에 준비를 충분히 하였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목표물을 명중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사전 계산이 필요하다 ] 


이처럼 탄도 계산은 매우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일이다. 이를 쉽게 계산할 수 있다면 사격 준비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초탄부터 적을 정확히 타격할 수 있다. 더구나 2차 대전 말기에 등장한 V-2같은 로켓은 장거리 타격을 가능하게 해주었지만 거리가 멀어질수록 탄도를 정확히 예측하기는 더욱 힘들어졌다. 만일 계산이 잘못되어 값비싼 장거리 로켓이 엉뚱한 곳에 떨어진다면 그야말로 낭패였다.



[ 로켓처럼 사거리가 긴 무기의 탄도 계산은 상당히 중요하다 ]


명중률을 높이려면 포탄이 날아가는 궤적은 물론 온도, 습도와의 관계를 함께 계산해야 하는데 불과 60초 정도 비행하는 탄도를 정확히 알아내려면 수학자들이 평균 약 20시간 이상 계산을 해야 했다. 당연히 실전에서 사용하기 어려워 미군 당국은 편리하고 빠른 계산 방법을 찾으려 노력하였다. 당시에도 기계식 계전기를 이용한 계산기가 있었지만 탄도 같은 고난도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속도도 느렸다.




[ 미군은 빠른 계산 방법을 찾는데 혈안이 되었다 ]


미 육군 탄도 연구소는 1943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공학 교수였던 존 모클리(John Mauchly)에게 해결책을 의뢰하였다. 모클리는 졸업생인 존 에커트(John Eckert)와 팀을 결성하여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는데 이를 ‘프로젝트 PX’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연구에 착수한지 3년이 되던 1946년, 빠르게 그리고 정확히 탄도를 계산하여 줄 수 있는 새로운 기계를 완성하였는데 난제 해결의 상징답게 그 규모도 엄청났다.




[ 군부의 의뢰로 프로젝트를 진행한 모클리(좌)와 액커트(우) ]


20평 크기의 방 전체를 차지하는 무게 30톤의 계산기는 17,000여개의 진공관과 7,000여개의 다이오드, 70,000여개의 레지스터로 이루어졌는데 가동에 들어가면 인근 마을의 전기 공급에 문제가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수학자보다 20만 배나 빠른 속도인 30초 만에 주어진 탄도 계산을 너끈히 해내었다. 십진수 10자리의 곱셈을 0.0028초, 나눗셈을 0.006초 이내에 처리할 수 있는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였다.



[ 거대한 크기의 계산기의 연산 속도는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 


이 놀라운 기계의 이름은 에니악(ENIAC)이었는데 바로 새로운 문명의 이기(利器), 컴퓨터였다. 비록 프로그램 내장 식 컴퓨터와는 개념이 다르지만 에니악은 인류사에 있어 새로운 문명의 태동을 뜻하는 사변이었다. 1942년 제작된 아타나소프-베리(Atanasoff–Berry)를 최초로 보는 경향도 있기는 하지만 에니악을 실용적으로 사용된 최초의 컴퓨터로 거론하는데 별다른 반론이 제기되지 않는다.



[ 에니악은 실용화에 성공한 최초의 컴퓨터다 ]


그만큼 에니악이 컴퓨터 역사에 남긴 발자취는 어마어마했다. 이후 컴퓨터는 우리 삶과 단 일초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물론 오래 동안 거대한 조직이나 기관만이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컴퓨터를 개인들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만든 스티브 잡스(Steve Jobs) 같은 인물이 있어 그 발달이 가속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탄생 없이 발달이 있을 수 없으므로 에니악의 등장은 그만큼 위대한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 군사적 목적에서 탄생하였지만 컴퓨터는 삶의 일부가 되었다 ]


그런데 이러한 이기의 탄생을 이끈 것은 군사적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이유가 없었어도 언젠가 컴퓨터는 등장하였겠지만 군사적인 문제는 그 발달을 촉진 시켰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컴퓨터는 이것 없이 전쟁을 벌일 수 없는 시대를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그보다도 당장 컴퓨터가 사라진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삶 자체가 곧바로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전쟁보다 더 무서운 상황일지도 모른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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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알아보는 군수] 65, 995 그리고 2조 3천억(부품 국산화율 65%, 상용품 전환, 중소기업 제품 구매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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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 물자 부품 국산화율 65% 목표 



“국산품을 찾아라!” 

우리 군에 한국산 군수품 구입을 우대하는 ‘바이 코리아(buy korea)’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어떤 산업분야나 물품이건 간에 국산품 애용이 곧 애국인 것은 말할 필요가 없죠. 외화를 아끼고, 국내 생산업을 육성하고, 국산 기술을 축적할 수 있고……. 구입자 측에서도 같은 성능과 품질이라면 국산이 가격도 저렴하니 이득이고요.

 

특히 군수품의 경우는 비상시에 부품과 장비를 급박하고 원활하게 공급받기 위해 국산화가 더욱 중요합니다. 해외 수입에 의존할 경우 재고가 떨어지거나 해당 부품이 단종될 경우 당장 장비를 운용하는 데 문제가 생기거든요. 그래서 중국의 경우 방탄복과 헬멧에 자국산 폴리에틸렌 사용규정을 명시해 운영하는가 하면, 터키도 자국산 군수품에 가산점을 두고 있는 등 세계 각 국이 자국 제품 우선 사용에 박차를 가하고 있죠.  




현재 우리 군수품의 국산화율은 60% 수준. 그 중에서도 항공분야의 국산화율이 뒤떨어져 53% 정도에 불과합니다. 일부 핵심 부품은 해외 수입 의존도가 높아 국내 기술개발이 시급하고요. 그래서 우리 군은 부품국산화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에 돌입했습니다. 국산 무기체계 국산화를 위해 2017년까지 5,000억 원을 투자하고, 민간업체들이 군수 분야에 보다 쉽게 진입할 수 있도록 국방규격을 폐지하거나 완화하는 한편, 연중 인터넷 사이버전시장을 개설해 부품개발 신청 절차 등을 소개하고 있죠. 


이렇게 해서 우리 군이 목표로 하는 국산화율은 일단 2017년까지 일단 65%를 달성하는 것! 이렇게 국산화 비율을 높임으로써 방산부품 수출도 현재 8억 달러에서 15억 달러로 늘리고, 국내 방산부품업계 일자리도 1,500개를 만들어 내겠다는 것이 목표입니다. 국방을 위해서도, 나라살림을 위해서도, 국민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도 군수품 국산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995개 국방규격품을 상용품으로 전환  




군에서 사용하는 군수품은 크게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군에서만 사용할 목적으로 특수하게 만들어진 군수품이고 다른 하나는 시중에서 사용하는 물품들을 그대로 또는 약간 개조해서 사용하는 군수품입니다.


군에서만 사용할 목적으로 특수하게 만들어 진 군수품은 ‘국방규격’이라는 군에서만 사용하는 규격으로 조달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군은 아주 추운 지역에서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상황도 염두에 두어야하기 때문에 어떤 물품들은 아주 낮은 온도에서도 작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물품들은 일반 민간시장에서는 구할 수 가 없지요. 그래서 따로 특수하게 군용으로 제작됩니다. 이런 엄격한 기준과 소량 제작이라는 이유 때문에 국방규격으로 조달하는 물품들은 시중 물품보다 가격이 다소 비싼 편입니다. 


또한 요즘과 달리 과거에는 군에서 필요한 물품들이 민간시장에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군용으로 따로 제작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기술이 놀랄 정도도 발전해서 군에서 원하는 성능을 가진 우수한 물품들을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습니다. 시중에 동일한 성능의 상용품이 있다면 굳이 국방규격으로 따로 만들 필요는 없겠지요. 


이러한 여건 변화를 고려해서 군도 이전에는 국방규격으로 조달하던 품목들을 민간에 있는 상용품을 구매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2013년만 해도 995개 품목의 국방규격품을 상용품으로 전환되었으며 군에서 2014년 조달하는 물품의 약 85% 정도는 상용품입니다. 앞으로 이 비율은 더욱 높아질 예정입니다.


국방부는 국방규격품을 상용품으로 전환하는 한편, 국방규격으로 조달하는 품목들에 대해서는 보다 많은 중소기업들이 계약에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지요. 도면과 같은 국방규격 내용을 인터넷에 공개하는 거지요. 


국방규격을 보고 제품을 제작할 수 있는 중소기업들은 그 품목을 납품하는데 참여할 수가 있겠지요. 그렇게 되면 기업은 군에 납품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 좋고 군은 참여 업체수가 많아지면서 계약단가가 저렴해 지고 우수업체의 참여가능성이 높아져서 좋겠지요. 2013년 현재 국방규격서 기준으로 19%인 공개율을 2018년 51%까지 높일 계획입니다.







중소기업제품 구매액은 2조 3천억원




‘나눔과 배려’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중소기업 살리기 바람’이 군에도 불고 있네요. 정부기관이 중소기업제품을 일정 비율 이상 구매하도록 한 국가시책에 따라, 군도 같은 값에 비슷한 품질이면 중소기업이 만든 제품을 우선적으로 구매하고 있는 겁니다.    


정부기관이 중소기업제품을 사야 하는 법정의무구매율은 50%. 그런데 군은 이미 이 의무구매율을 훌쩍 뛰어넘는 실적을 보이고 있습니다. 2013년의 경우 중소기업제품 2조 3천억원 이상을 구매하여 76.4%의 구매율을 올린 데 이어 2014년에는 77.2%로 목표를 상향조정하고, 중소기업제품 구매를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군의 중소기업 살리기는 제품을 구매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방위사업청은 중소기업을 상대로 한 방산육성자금 대출금리를 1%에서 0.5%로 낮추고, 고부가가치 핵심부품 국산화 개발을 위한 지원액을 기존의 최고 10억 원에서 50억 원으로 높였습니다. 


또 있습니다. 중소기업이 정부사업을 통해서 확보한 기술을 다른 분야에 활용할 때는 ‘기술료’를 정부에 내야 하는데, 그 기술료도 기존 20%에서 10%로 낮춰 부담을 덜어주었죠. 


방산전시회 참가비도 대폭 보조해주고요. 더불어, 신규업체가 국방사업에 보다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온라인에 국방 규격을 더 많이 공개하고, 지난 2013년에는 인터넷 상에 ‘국방기술 거래장터도 개설했답니다. 


국방기술에 어떤 ‘신상’이 성공적으로 진입했는지 확인하고 싶으시다면 거래장터 사이트 http://techmart.dtaq.re.kr/techmart/main.do를 클릭해보세요.


한 가지 더! 이제 국방조달계약에서는 더 이상 ‘갑’이나 ‘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부와 업체 사이의 수평적 관계 문화가 자리잡도록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의 불평등 관계를 상징하는 기존의 ‘갑’과 ‘을’이라는 표현을 앞으로 완전히 쓰지 않도록 했기 때문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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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전투기의 북한 종단 14시간 출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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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전투기의 북한 종단 14시간 출격



얼마 전 KBS 방송에서 미국 알래스카 기지에서 있었던 레드 플래그 훈련에 참가하기 위해서 장거리 비행으로 알래스카까지 날아간 공군 F-16 전투기 편대의 스토리가 방영되었었다.


이 프로는 4기 1개 편대가 한국 기지에서 이륙하여 공중 급유 방법으로 8,000km의 장거리를 날아 무사히 알래스카 기지에 도착하는 과정을 긴장감있게 소개하였다. 군사물로서는 근래 보기 드문 수작(秀作)이었다.



레드 플래그 훈련 참가 공군기


이 프로그램을 보니 60년 전 한국 전쟁 때 한 미군 전투기가 일본 공군 기지에서 출격하여 여러 번 공중 급유를 받으면서 북한을 종단 타격하고 무려 14시간 만에 귀환한 출격을 소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압록강 상공으로 출격하던 F- 86 전투기들의 출격시간이 대부분 두 시간이었던 사실을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장거리, 장시간의 출격이었다.


1952년 한국 전쟁인 1952년 9월 28일, 미 공군의 해리 W. 도리스 중령이 조종하는 F-80C 기가 265 갤런의 보조 연료 탱크 두 개를 양 날개 끝에 장착하고 일본 요코다 공군 기지를 이륙하여 북한으로 향했다.


 

F-80


F-80은 미국의 록히드 사에서 제조한 미 공군 최초 제식 전투기로서 역사적인 명기로 꼽히지만 당시는 공산측이 한국 전선에 최신 미그 15기를 투입하는 상황이 되자 요격 임무는 더 신형인 F-86에게 양보하고 대지 공격 임무만을 수행하고 있었다.


양 날개 끝에 보조 연료 탱크를 부착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드럼당 연료가 55 갤런이 든 열 드럼의 연료를 보조 연료를 담을 수가 있었으나 이륙 때 도리스 중령 기의 보조 연료 탱크는 비어있었다. 전투기는 폭탄과 기총탄 등으로 최대한의 무장를 했었기에 이륙을 위해서 경량의 기체 중량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F-80


이륙 직후 1,5000 피트의 상공에 도달한 그의 애기는 상공에서 대기하던 KB-29M 급유기로부터 만(滿)탱크의 급유를 받았다. 급유 임무를 수행했었던 KB-29M는 태평양 전쟁 때 일본 본토에 원폭 투하를 비롯한 전략 폭격의 주역기인 B-29기를 급유기로 개조한 것이다.



KB-29M


연료와 폭탄을 만재한 그의 전투기는 물결 높은 동해를 가로질러 일로 북상하였다. 북한 영공에 침투한 그는 목표가 있는 함경북도 길주로 향하였다. 남한 공군 기지에서 먼 이 곳은 유엔군의 폭격이 별로 없었던 곳이었다. 


도리스 중령은 북한군 군수 물자가 저장되어 있던 4층 크기의 빌딩을 겨냥하고 500파운드 폭탄 두 발을 투하하여서 파괴하였다. 폭격 임무를 완료한 그의 F-80C 형은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던 급유기로부터 다시 급유를 받았다. 충분한 급유를 받은 그의 애기는 기수를 남서쪽으로 돌리고 한반도를 비스듬히 가로 질러 남하하였다.


그의 전투기가 다시 나타난 곳은 서해안 옹진반도의 군수품 집적소였다. 도리스 중령은 급강하해서 목표에 6인치 로케트 탄 4발을 발사하였다. 옹진반도의 목표를 타격한 도리스 중령은 기수를 좌로 돌려 한반도를 횡단하며 동해로 향했다. 북한 이탈 비행 중에 도리스 중령은 평안남도 양덕군에서 야영하고 있던 북한군 집결지를 발견하였다. 


이제 남은 무장은 50구경 기관총탄뿐이었다. 그는 기수를 낮추어 북한군에게 기총탄들이 모두 소진될 때까지 소사(掃射)를 가하고 이탈하였다. 비행 도중 도리스 중령은 자신이 발견한 공중 폭격의 목표가 될 만한 대상들은 모두 노트에 기록을 해가며 추가 임무인 정찰 임무도 충실히 이행하였다.


북한을 벗어난 그는 동해 상공에 진입하여 계속 비행을 하였다. 밤이 오고 있었고 연료가 거의 소모되고 있었다. 그는 캄캄한 밤에 약정 지점에 대기하고 있었던 급유기로부터 다시 급유를 받았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야 그의 F-80은 아침에 출발했었던 일본 요코다 공군 기지에 착륙할 수가 있었다. 무려 14시간 20분간의 장시간 비행을 했으며 이 중 10시간은 적지인 북한 영공에서 비행한 시간이었다.


 

F-80의 네이팜 대지 공격


미 공군 급유기 역사에는 그가 14시간 비행 동안 급유 받았던 횟수가 6번이나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장거리 출격은 전투기가 급유를 받아가며 수행할 수 있는 장거리 출격의 능력을 테스트할 목적으로 실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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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오비의 군모닝] 134화 부대 밖에서도 후임을 챙기는 고참! 이런 고참 또 없습니다!!

4화 첫대면 ( 긴장과 긴장 그리고 긴장 )

[주한미군 장병초청 한국 문화체험] 한국 국방부에 울려퍼진 미군들의 기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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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장병초청 한국 문화체험] 


국방부에 울려퍼진 주한미군 장병들의 태권도 기합소리!!




"하나아~!! " 


  - "허이야!!! "


'두울~~!!" 


  - "허이야!!! "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이 소리는 태권도 동작을 하면서 넣는 기합소리인데요.   

이 소리의 출처는 바로, 우리 국방부에서 태권도를 배우면서 국방부 체육관을 쩌렁쩌렁 울리면서 낸 주한미군 장병들의 태권도 기합소리입니다. 


국방부에서는 한·미 양국군의 우호를 증진하기 위한 한국문화 체험행사로 4월 21일(화) ~22일(수) 이틀간 '주한미군 장병 태권도 캠프'를 진행했습니다.    


'한국문화 체험행사'는 

한·미국 양국간의 우호증진 차원에서 주한미군 장병들에게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여 한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것으로 1972년부터 올해까지 연인원 1만8천여 명이 참가해 오고 있는 국방부의 공식 행사입니다.


올해는 4월의 태권도 캠프를 시작으로 5월~6월에는 서울 고궁·박물관 투어, 7~8월에는 2함대와 수원성 안보투어, 10월에는 경주 역사탐방 및 해인사 템플스테이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주한미군 장병들에게 우리나라의 역사화 아름다운 문화를 소개할 예정입니다.    



이 중 '주한미군 장병 태권도 캠프'에 동고동락 지기가 방문해봤는데요. 우렁찬 기합소리가 드높았던 태권도 캠프의 생생한 현장을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이번 태권도 캠프에서는 태권도의 유래와 역사, 기본자세, 호신술 및 격파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었는데요. 주한미군 장병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고 시범을 보여준 우리나라 대표로는 육군 제3야전군사령부 태권도 선수단과 국가대표 태권도 선수들이 참여해주었습니다.  
박수~~~ 짝짝짝!!!!! 

국방부 체육관 입구에 들어서자 동고동락 지기를 맞아준 X-배너!! 

Welcome!!!! 




주한미군 장병들 50명이 모여 앉아서 우리의 태권도에 대한 유래와 역사, 태권도의 장점 등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미군 장병들의 초롱초롱한 눈빛! 보이시나요?? 

(수많은 반짝이는 눈빛 중에 꼭 고개숙인 장병 찾아서 눈빛 안보인다고 하기 없기!!!! )




영국의 여왕님도 우리나라 태권도에 대해 알고 계시고, 데이비드 베컴은 태권도 초급자 수준이지만 그의 아들은 아주 잘하는 수준이라는 소개 멘트에 장병들이 "우오오~~~!!"라는 탄성을 내기도 했습니다.  




올림픽에서의 우리나라 태권도 사진도 보여주고, 태권도는 다이어트에도 좋고, 예절을 같이 가르치기 때문에 아이들의 교육에도 아주 좋은 무술이라고 소개되었습니다. 

  - 그래서 집 근처 한 집 건너 한 집에 사는 아이들은 다 태권도 도복을 입고 다니나 봅니다  




이론 교육을 마치고 드디어 주한미군 장병들의 태권도 체험이 시작됩니다. 

주한미군 장병들 모두 태권도 도복으로 갈아입고 하얀 띠를 질끈 묶습니다. 

미군 장병들 모두 오늘만큼은 성조기 대신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권도를 배워봅니다. 





모두 태권도 도복으로 갖춰 입은 후, 

태권도가 어떤 무술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태권도 시범이 시작됩니다. 


태권도 시범 사이에 신나는 음악을 틀어 경직된 분위기를 고조시키기도 했고, 




고공 격파 시범 실력을 뽐내면서




이것이 태권도!! 임을 마구 마구 보여줍니다. (멋져부러!!




시범을 마친 태권도 국가대표 선수단과 육군 제3야전군사령부 태권도 선수단들의 경례!! 




쏟아지는 박수!!!!! 




이제는 드디어 체험입니다. 다같이 몸풀기 들어가실까요? 

하나~ 두울~세엣~네엣!!!!! 




스트레칭이 시작되자, 처음에 해맑게 웃던 미군 장병들 사이사이 여기저기서  "끙~", "으으~~", "아아~악!"죽는 소리, 앓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역시 만만한게 아니었어~) 



스트레칭이 끝나고 신나는 음악에 맞춰 뛰고 구르는 본격적인 몸풀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줄별로 경쟁이라도 하듯 엎드리고, 전우를 뛰어넘으면서 앞으로 앞으로 이동!!  




시범을 보여준 한국군 대표들이 주한미군 장병들을 이끌어주고




누가누가 높이 뛰는지 경쟁하듯 뛰어오르면서 앞으로 달려가기도 합니다.  




몸풀기는 이제 끝! 


태권도의 기본동작 찌르기와 발차기를 배웁니다. 


"하나아~~"

"허이야!!! "




"두울~~"

"허이야!!! "





"세엣~~"

"허이야!!! "


밝고, 진지한 표정으로 동작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미군 장병들의 모습입니다. 

야무지게 쥔 두 주먹이 누군가는 복싱의 그것을 닮기도, 누군가는 다른 격투기의 그것을 닮기도 했지만 동작에 집중하는 모습 만큼은 어느 태권도장의 분위기 못지 않았습니다. 



주한미군 장병들 기본 동작을 다 배운 후, 실제 겨루기에 도전했습니다. 

한국대표 VS 미국대표가 마주서서, 겨루기할 때 주의사항을 신중히 듣고,




차렷~! 경례~!



한국 대표의 선제공격!



주한미군 장병의 반격!!




 

때로 겨루기에 집중하다가 태권도는 어디가고, 업히는 장면이 연출되는 바람에체육관이 웃음으로 떠들썩하게 되기했던 겨루기 체험 시간이었습니다.   



이번에는 호신술 체험 순서입니다.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았을 때를 가정한 호신술 시범을 보고  



미군 장병들끼리 합을 맞추어 봅니다. 

쉽진 않지만 기합을 넣으며 열심히, 열심히!! 



호신술 순서가 끝나고 태권도 캠프 일정의 마지막 순서! 

격파체험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자세잡고



호흡 고르고



이야압~~~!!! 



어떨 땐 한 두장, 



때론 박살!!! (우와~ 박력!!!!)


그리고 나선???????????  



다음 사람을 위해 조립!! 

(무한대로 격파연습을 할 수 있도록 재조립이 가능한 판이었답니다ㅎㅎ)

한국군과 미군이 같이 격파판을 조립하는 모습! 사이 좋아보이죠?   



주한미군 장병들의 시원시원한 격파를 영상으로 보시면서 오늘 포스팅은 여기서 마무리할까 합니다. 



이번 주한미군 장병 태권도 캠프를 통해 주한미군들이 한국의 문화를 좀 더 이해하고 

오늘 미군 장병들이 한국에서 근무하는 동안 오늘 각자의 가슴에 붙어 있었던 태극기를 기억하기를 바래보았습니다. 이번 행사가 한국과 미국의 우호적인 관계가 지속되고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We go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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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언브로큰의 포로 영웅과 극악 감시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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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언브로큰의 포로 영웅과 극악 감시원 -1-

 


안젤리나 졸리가 감독한 영화 ‘언브로큰’이 상영되었다. 이 영화에는 비행기의 추락과 장기간의 표류, 짐승보다 못한 포로의 운명을 극복해낸 불굴의 영웅과 그를 잔인하게 괴롭힌 악당이 나온다. 그리고 보는 시각에 따라 그 사연은 우리 민족이 걸어야 했었던 행적과 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언브로큰의 감독 안제리나 졸리가 주인공 루이 잠페리니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 불굴의 영웅인 루이 잠페리니의 인생부터 소개하자. 잠페리니는 1917년 1월 26일 뉴욕에서 이태리에서 이민 온 앤서니 잠페리니와 루이스 실비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세 살 때 캘리포니아 토렌스로 이사와서 이곳에서 성장하였다.

 

동급생들이 영어를 잘못하는 그를 놀려대자 그는 아버지로 부터 권투를 배워서 이들을 평정해버렸다. 잠페리니가 재미를 가지고 싸움질에만 몰두하자 형인 피터는 그가 소속된 학교 육상 팀에 합류시키고 훈련을 시켰다. 피터는 1학년부터 달리기에 출중한 능력을 발휘해서 중거리 분야에서 여러번 입상하기도 했다. 

 

그의 실력은 일취월장하였다. 각종 육상대회에서 휩쓴 우승 기록 덕분에 남가주 대학으로부터 전액 장학금을 받게 하였다. 1936년 잠페리니는 베를린 올림픽에 도전하였다. 마라톤에서 우리나라의 손기정 선수가 우승했었던 올림픽 경기였다.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서 먼저 뉴욕에서 열리는 미국 예선부터 통과해야 했었다.

 

당시 미국의 올림픽 도전자들은 출전 경비를 자비로 부담하여야 했다. 철도 회사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미국 횡단 열차표를 얻어주었다. 그의 고향인 토렌스 주민들은 모금 활동을 해서 그의 출전을 도왔다. 뉴욕에서 열린 예심에서 그는 불리한 여건을 물리치고 출전 선수로 선발되었다. 그의 나이 19살이었을 때였다.

 

베를린으로 간 잠페리니는 5,000미터 경주에 도전하였다. 그러나 세계의 실력자들이 참가한 5,000미터 경주에서 그는 8위의 성적밖에 거두지를 못했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올린 놀라운 스퍼트는 히틀러의 관심을 끌어 후에 그와 대담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언브로큰은 로우라 힐렌브란드 여사가 쓴 책을 토대로 구성되었다.


올림픽 후에 그는 남가주 대학에 입학하여서 육상생활을 이어갔다. 재학 중인 1938년 그는 전국 대학생 육상 대회 1마일 달리기 경주에서 4:08의 놀라운 기록을 세우고 우승하였다. 이 대학생 육상대회 기록은 15년간 깨지지 않았다.

 

그러나 전운이 깊어지는 1941년 잠페리니는 학업을 잠시 중단하고 군문에 들어갔다. 그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41년 9월 미 육군 항공대에 간부 후보생으로 지원해서 훈련을 받고 소위로 임관하였다. 그가 최초로 받은 보직은 태평양 푸나푸티 비행장의 B-24 폭격기 ‘슈퍼맨’의 폭격수였다.

 

1943년 4월, 그의 폭격기는 일본이 점령하고 있는 나우루 섬 폭격 작전에 출격했다가 대파되었다. 겨우 살아 돌아왔으나 폭격기 ‘슈퍼맨’은 더 이상 비행이 불가능해서 고철로 처리해야 했다. 



나우루 섬을 폭격하는 B-24


전 승무원들은 모두 하와이로 돌아와서 재배치를 기다렸다. 잠페리니와 다른 몇 명의 전우들은 하와이에 기지를 둔 7공군 탐색구조 부대에 배치되었다. 

 

새로 주어진 B-24기는 ‘그린 호넷’이라는 기체명을 가진 것으로서 부대 조종사들 사이에 고장이 많기로 악명이 높았었다. 1943년 5월 27일, 탐색 출격 중에 기체에 기관 고장이 발생했다. ‘그린 호넷’은 고장을 극복하지 못하고 하와이 오하우 섬에서 남쪽 850마일 해상에 추락하였다. 



출격 직후 슈퍼 맨에 명중한 20mm 피탄 부분을 살펴보는 잠페리니


11명의 승무원 중에 8명이 사망하고 잠페리니를 비롯한 세 명만이 살아남았다. 구명 보트로 탈출한 세 사람은 잠페리니와 조종사 러셀 알렌 필립스, 프랜시스 맥나마라였었다. 

 

보트에 세 사람이 준비된 물이나 먹을거리는 거의 없었다. 세사람은 겨우 내리는 빗물이나 보트 옆에 모여든 작은 생선들을 잡아 연명했다. 세 명은 구명 보트 근처로 다가온 알바트로스 두 마리를 잡았다. 장거리를 날아다니는 대형 알바트로스 [신천옹]고기는 생명 연장에 큰 힘이 되었다 세 명은 알바트로스를 날로 먹어 치우고 일부를 낚시 미끼로 사용하였다.


상어들이 자주 나타나서 생존자들의 보트 주변을 배회하며 전복시키려고 시도를 하였다. 때로는 폭풍이 찾아와서 보트가 침몰하기 직전까지 가기도 하였다. 상공을 지나는 일본 폭격기들은 미군 표류자를 발견하고 저공 비행으로 기관총 사격을 해서 보트에 구멍을 냈지만 아무도 총탄에 맞지를 않았었다. [영화에서는 전투기가 기총소사를 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런 표류 33일 만에 맥나마라는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표류는 2개월 째를 향하여 다가가고 있었다. 두 사람 다 구조의 가능성을 포기하려는 심정이었던 표류 47일째, 기적적으로 마셜 제도의 한 섬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도착하자마자 해안을 감시하던 일본 해군 감시병들에게 붙잡혔다. 사지에서 살아나왔지만 두 사람은 이제부터 짐승 같은 취급을 받는 포로 생활을 전쟁이 끝나는 1945년까지 겪어야 했다. <계속>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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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 이벤트]'어' '버' '이' '날'로 4행시 짓고 부모님께 효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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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장병 여러부운!!!! 이 글 아래 비밀 댓글로 이름, 계급, 전화번호(부대, 집 번호 모두), 부대명과 부대주소 그리고 '어', '버', '이', '날'로 지은 4행시를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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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탄신일 특집]결코 당연하지 않은 전승(23전 23승 이순신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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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당연하지 않은 전승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굳이 겪어보지 않았더라도 전쟁이 얼마나 무섭고 비참한 행위인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다수가 원하지 않더라도 인류사에는 히틀러나 도조 히데키처럼 전쟁을 쉽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무수한 전쟁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 이처럼 침략 행위를 벌이는 이들이 있는 한 인류사에서 전쟁이 완전히 사라지기는 힘들 것이다.



[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 때문에 인류 역사에 피의 기록이 멈추지 않는다 ]


전쟁이 벌어지지 않도록 막는 행위가 가장 중요하지만 일단 시작된다면 모두가 승리를 위해서 매진한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그 과정 중에 벌어지는 무수한 전투에서 되도록 많은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 그러나 모두가 싸움에서 이기기를 원하지만 그것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왜냐하면 전쟁, 전투와 관련한 모든 것이 앞날을 내다볼 수 없는 인간들이 벌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 전쟁에서 승리를 하더라도 그 안에는 수많은 패배의 기록도 함께 있다 ]


그래서 전쟁 중 명성을 얻은 수많은 장군들이라도 전세가 열세이거나 환경이 불리할 경우 패배를 당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을 당연하거나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후퇴를 무조건 패배와 동일 시 할 수는 없지만 후퇴는 패배 과정 중 차후 반격을 위해 피해를 최소화하는 위한 것이다. 특히 이런 모습은 양측의 전력이 대등한 수준이면 흔하게 일어나는 작전의 한 형태다.



[ 1941년 여름에만 200만이 포로가 되는 참패를 연이어 당했지만

소련은 4년 간 이어진 독소전쟁에서 결국 승리하였다 ]


그런데 장기간의 전쟁 동안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승리와 패배의 반복된 모습을 완전히 부정하는 위대한 장군이 우리 역사에 있었다. 바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다. 그를 수식하거나 상징하는 지표는 무수히 많지만 군사적으로만 놓고 본다면 23전 23승만큼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것은 없다. 세계사적으로도 임진왜란처럼 수많은 전투가 반복되는 거대한 전쟁에서 이런 기록을 남긴 이는 없다.



[ 이순신 장군의 전과는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대기록이다 ]


전설의 경지에 올랐을 만큼 장군의 전과가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그 동안 이런 승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많지만 이는 결코 재현되기 어려울 만큼 뛰어난 업적이다. 단 한 번의 패배도 없다는 자체가 인류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기록이다. 더구나 무조건 압도적인 전력으로 왜군을 몰아붙인 것도 아니고 설령 패했어도 비난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전력 격차가 있었던 경우에도 그는 승리를 거두었다.



[ 충무공은 객관적으로 불리한 가운데서도 승리를 엮었다 ]


그러면 어떻게 장군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100퍼센트의 놀라운 승률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인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는 기초에 가장 충실했던 인물이었다. 이와 관련하여《손자(孫子)》모공편(謀攻篇)에 동양의 전쟁 사상을 표현한 유명한 내용이 있다.

知彼知己百戰不殆 不知彼而知己一勝一負 不知彼不知己每戰必敗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도 위험하지 않다. 적을 몰라도 나를 알면 한번 이기고 한번은 진다. 적도 모르고 나도 모르면 매번 싸움마다 진다.)



[ 이순신은 누구보다도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지휘관이었다 ]


이순신은 자신과 자신이 지휘할 부대 그리고 전투를 벌여야 하는 시공간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 때문에 자신의 의도대로 전투를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숫자가 많으면 좋겠지만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충분한 대응책을 낼 수 있었고 이는 자신부터 제대로 알지 못한 왜군과 커다란 차이였다. 12척으로 133척의 왜군 함대를 격파한 명량해전은 바로 그러한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 증거다.



[ 이순신에게 당연한 전승이 아무나 이룰 수 있는 업적은 아니다 ]


매번 다른 방법으로 전투를 벌이다보니 왜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7년의 전쟁 동안 옥포해전에서 노량해전까지 거둔 23전 전승의 기록이 달성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이런 업적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보통의 사람들에게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본다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단순하지만 명료한 능력이 이순신 장군과 그의 업적을 신화가 되도록 만든 것이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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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언브로큰의 포로 영웅과 극악 감시원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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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언브로큰의 포로 영웅과 극악 감시원 -2편-



두 사람은 포로가 된 뒤 42일 동안 콰자레인 환초도에 구금되어 있다가 일본 본토의 오후나 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일본 당국은 적십자사에 통보하는 포로 명단에서 두 사람을 빼버렸는데 이는 명백한 제네바 협약의 위반이었다. 미국에서는 이들이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잠페리니의 2인 포로는 다시 도쿄 인근의 오모리[大森] 포로 수용소로 옮겼다가 다시 일본 북부에 있는 나오에쓰[直江津] 포로 수용소로 이감되었다.두 사람은 나오에쓰 수용소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용 생활을 하게 된다.

 

잠페리니는 이곳에서 악마라는 단어 외에 달리 표현하기가 적절한 단어가 없을 정도로 잔인한 포로 감시병 와타나베 무쓰히로[渡邊 睦裕]를 또다시 만나게 된다. 잠페리니는 오모리 수용소에서 와타나베와 짧은 만남은 있었지만 깊은 관계는 없었다.

 


와타나베 무쓰히로


이 인간에 대한 설명을 해보자.


와타나베는 포로들 사이에 버드[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918-2003] 그의 잔인함은 그의 출신 환경이나 성장 과정이 비정상인 것으로 짐작하게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는 않다. 일본의 상류층 가정 출신으로 부유하게 자랐고 좋은 대학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 와타나베의 부모는 호텔과 광산을 소유한 부자였다.


그는 그런 부자 부모 사이의 여섯 명 자식 중의 네 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유복한 집안에서 잘 큰 와타나베는 와세다 대학에 진학하여 불문학을 전공하였다. 와타나베는 졸업 후 도메이 통신[同盟 通信]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징집당했다. 군에 입대한 후에 그는 그의 형이 그랬듯이 간부 후보생으로 선발될 줄 알았지만 그렇게 되지를 않았다.

 

그의 소속은 포로 수용소를 관리하는 근위 보병 1연대 소속으로 여러 곳의 포로 수용소로 옮겨 다니며 근무하였다. 패전시 계급은 군조[軍曹- 중사]였다가 일본군이 패전 후에 군대를 해산 할 때 간부들을 일률적으로 승진시킨 덕분에 최종 계급은 조장[曹長- 상사]으로 기록되었다.

 

장교가 될 수 없었던 그의 좌절감과 열등감이 그의 잔인성 발휘에 한 요인이 되었다고 분석되고 있다.

 

잔인한 와타나베는 매일 포로들을 구타했다. 그에게 맞은 포로들은 고막이 터지거나 목의 기도(氣道)가 파손되거나 이빨이 날아가기도 했었다. 그는 그것도 부족해서 한 포로의 귀를 반쯤 잘라버리기도 하였다.

 

그는 한 겨울에 훈도시[일본식 팬티]만 입은 한 장교 포로를 땅에 파묻은 드럼통만한 상자에 가두어 놓고 나흘간이나 방치하기도 하였다. 


그는 65세가 되는 연로한 포로 한 명을 나무에 묶어두고 16일간 그냥 두기도 하였고 한 포로에게 매일 찾아와서 신고하게 하고 신고할 때마다 얼굴에 핵 펀치를 날렸었다. 와타나베는 핵 펀치를 가격하는 엽기적 폭행을 3주간이나 했었고 맹장염으로 신음하는 포로 환자를 유도로 땅에 패대기치기도 했다.



영화 언브로큰의 포로 수용소



와타나베는 사석에서 사람을 팰 때마다 쾌감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하였는데 하여튼 그는 가학성 변태 성욕자인지도 모른다. 그는 정서가 극히 불안정한 기분파이기도 했다. 하루는 사람을 패고 다음 날은 두들겨 맞아서 만신창이가 된 희생자에게 캔디를 한 주먹씩 주거나 담배도 몇 갑 씩 던져주기도 하였다.

 

와타나베는 포로 수용소에서 올림픽 스타의 경력에 기적적인 생존으로 포로들에게 영웅처럼 존대 받는 잠페리니를 지극히 미워하였다. 그의 인기를 시기한 것이었다.

 

그는 잠페리니에게 통나무를 37분이나 들고 있게 했다가 내려놓자 복부에 훅을 한 방 먹였다. 와타나베는 포로들을 두들겨 팰 때 “게이레이[敬禮]!”구호를 연발하며 포로들을 부동의 자세를 유지하게 하였다. 이 자에게 무수히 두들겨 맞은 잠페리니는 전후 미국에 돌아와서 비슷한 소리를 들으면 자동적으로 차렷 자세를 하는 증세를 보였다.


와타나베의 악명은 패전 후 일본에 설치된 맥아더 사령부에서 현상 수배한 전범 40인중 23번째의 인물로 올라가게 하였다. 와타나베는 자신이 수배된 것을 알자 일본 점령 미 군정 기간 동안 깊숙이 잠적했다. 그는 7년간 농장의 인부나 식품점 점원으로 일하면서 체포를 피해 다녔다. 미군정이 끝나자 그에 대한 수배령도 자동 폐기되었다.


독일은 현재까지도 전쟁 범죄자들을 추격하여 나이 90이 다 된 나치 잔당까지 체포해서 단죄하고 있지만 일본은 인류 보편적 양심과 도덕을 위반한 이들 동족 전범들을 그대로 놔두고 문제 삼지 않았었다.

 

이렇게 7년간 도망 다니다가 미군정이 종식되자 컴잉 아웃에 성공한 자로 일본 군벌 최대 또라이 장교 쓰지 마사노부[辻 政信]대좌가 있다. 그는 싱가포르나 필리핀의 민간인들과 포로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대형 전범이기도 했었다.그 전범질의 수준이 와타나베 따위와 비교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무거운 헤비급이었으나 미군은 이 인간을 체포하지 못했었다.


 

쓰지 마사노부 대좌


그는 세상에 나온 뒤에 체포를 피하여 도망 다닌 그간의 기록[潜行 三千里]을 출판하여서 돈도 벌고 그 인기로 중의원까지 되었었다.


일본 민족 전체가 전범 심리가 있었으니 이런 것들을 그냥 놔두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위안부 문제에 그처럼 뻔뻔한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도 민족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계속>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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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알아보는 군수]43 그리고 790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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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외자 직구매로 연 평균 43% 예산 절감 



요즘 해외 직구(直購)가 뜨고 있죠. ‘직구’란 국내 소비자가 중간 수입상을 거치지 않고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해외에서 직접 물건을 사는 ‘직접구매’를 말합니다. 직구의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싸게 살 수 있다는 점. 원하는 물건이 국내 들어와 있지 않거나 재고가 떨어졌을 때 소비자가 직접 해외 본사를 통하면 희귀품까지 구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이고요. 


우리 공군도 인터넷을 통해 해외 제작자나 현물 보유업체로부터 직접 구매하거나 수리하는 외자 직구매를 지난 2002년부터 실시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막대한 예산을 절감할 수 있었죠. 지난 11년 동안 직구매를 통해 공군이 구입한 군수품은 710억 원 어치. 같은 물품을 다른 통로로 구입했다면 1,406억 원이 소요되었을 터이니, 직구를 통해 연평균 43% 저렴하게 구입한 셈입니다.




직구매는 또한 대상 업체와의 계약기간이 평균 1개월 미만으로 매우 짧습니다. 일반 상업구매로는 평균 218일에 달하는 계약기간이 7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그만큼 행정 처리에 소비되는 기간도 줄어들죠. 또 계약으로부터 물품 도입까지 걸리는 기간도 평균 359일에서 56일로, 직수리는 222일에서 175일로 줄어들어 필요할 때 빨리 군수를 조달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다만, 단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시중의 해외직구와 마찬가지로 계약 취소율이나 납기 준수율, 하자 발생률이 다른 상업거래보다는 높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군수의 특성 상, 긴급하게 구입해야 할 무기류나, 다른 루트로는 구하기 어려운 물품을 조달하는 데 있어서 외자 직구매는 다른 구입 경로에 비해 월등 유리하답니다. 또한 무기중개업자들이 챙기는 중개수수료, 일명 리베이트로 많은 국고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외자 직구매는 꼭 필요하지요. 


이에 따라 군은 현재 공군에서만 시행되고 있는 외자 직구매를 육군과 해군에서도 실시하기 위해 2014년 말 해당 조직과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안을 마련 중에 있습니다. 물론 아무리 싸고 빠르다고 해도 품질을 확보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 염려마세요. 국방부는 기존에 각 군이 자체 실시하던 해외도입품 품질검사를 2012년부터 각 군과 국방기술품질원이 합동 실시하도록 개선, 한 단계 높은 수입군수품 품질보증을 확보했으니까요.  







국방조달 회전자금 도입시 수리부속에서만 790억 예산절감 기대 



국방부는 군에서 필요로 하는 장비와 물품을 제때, 신속하게 조달받기 위해서 ‘국방조달 회전자금 제도’ 도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회전자금’이란 세입과 세출 외에 따로 보유하여 운용하는 자금을 일컫습니다. 


현재 정부 물품을 조달하는 조달청 경우, 회전자금을 1조 3,000억 원 운영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회전자금을 방위사업청에 마련하여 무기체계 수리부속을 포함한 군수품을 조달하는 데 활용한다는 것이 ‘국방조달 회전자금’ 계획입니다. 


그러면 이 같은 자금이 필요한 이유는 뭘까요? 예산이란 앞으로 1년 간 정부가 계획한 지출을 국회가 승인한 정부의 지출계획서입니다. 그런데, 미리 장비의 고장을 예측하여 실제 사용될 수리부속 품목만을 지출계획에 담기가 매우 어렵죠. 


또한, 생산업체가 소수여서 소액인 주문에는 업체들이 응찰하지도 않아 매년 1,000여 품목은 계약도 체결되지 않는 실정입니다. 게다가 체결된 계약도 불이행․지연 등이 많아 예산년도 내 지출도 매우 어려운 실정입니다. 


시장 상황에 따라 연간 가격이 두 배 이상 상승하거나, 절반이하로 하락하는 품목이 8%에 달하는 등 가격 변동성도 매우 심하죠. 미리 계획된 예산대로 집행하기도 어렵고, 계획된 예산대로 집행하는 것도 부적절한 경우도 많습니다.


국방부는 회전자금을 도입하여, 실제 소요가 발생한 품목만을 회전자금을 통해 구매하고, 구매에 성공한 품목만을 각 군에 판매하여 자금을 회수하는 시스템을 운영하려고 합니다.


회전자금 제도가 도입되면, 군수품 조달에 엄청난 변화가 생깁니다. 재고가 부족한 군수품만을 구매하게 되어 수요적중률이 높아질 뿐 아니라, 예산편성시까지 발주를 기다리지도 않게 되어 조달기간도 짧아져요. 


가격이 폭락하거나, 생산 중단이 예고된 품목은 일괄 구매할 수 있어 대규모 조달예산도 절감할 수 있어요. 매년 지적받던 예산 집행부진도 해소하게 되지요. 


이러한 회전자금 제도 운영시 방산수출 촉진이나, 군내 재고품 자동 조절기능도 가능해집니다. 회전자금 제도를 연구한 한국조달연구원에서는 수리부속의 일괄구매만 잘 하더라도 연간 최대 790억 원의 예산절감 효과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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