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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세계 장병·청년 통일안보 비전 발표대회에 참여해주세요!!


[군 입대 가이드] '해병대 A to Z'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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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라면’ 당연히 귀신 잡는 해병대 아니겠어?

- 대한민국 최고의 특수부대 해병대원이 되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법 ‘천기누설’






해병대. 의무적으로 군 복무를 해야 하는 대한민국 남자라면 한 번쯤 고민해봤을 이름이죠. 빨간 명찰을 가슴에 달고 각 잡힌 걸음을 옮기는 해병대의 모습은 그야말로 ‘마초스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해병대의 멋진 모습은 우리가 상상도 못할 무시무시한 훈련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해병대를 상징하는 ‘악’과 ‘깡’이란 두 단어만 보더라도 군 생활 내내 이어질 혹독한 훈련과 서릿발 같은 군기를 알 수 있는데요. 그래서인지 해병대원들의 자부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입대를 앞둔 건강한 대한민국 청년 여러분, 혹시 지금 해병대 입대를 생각하고 있나요? 해병대의 모든 것을 알려드립니다. 팔로 팔로우 미~~~





‘해병대 A to Z’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Q. 꼭 해병대에 가고 싶습니다! - 지원자격






Q. 해병대 지원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 지원방법 바로가기 





Q. 해병대 선정의 평가기준은 무엇인가요? - 평가요소 및 배점기준 바로가기 


A. 해병대 전체배점은 총 240점입니다. 이 중 1차 평가요소는 고교생활기록부(고교성적 35점, 출결상황 45점)와 가산점(20점)을 합친 100점이며 2차 평가요소인 면접고사(60점) 및 체력검사(60점), 신체등급(20점)은 140점입니다. 고교생활기록부에 높은 배점이 부여된 것은 해병대의 기본인 ‘성실성’을 평가하기 위해서인데요. 고등학교 3년 동안 결석이 하루도 없으면 45점 만점을 획득하게 되고 1~2일은 43점, 3~4일은 41점, 5~6일은 39점, 7일 이상은 37점으로 배점됩니다. 


한편 해병대의 강도 높은 훈련을 견디기 위해서는 체력도 좋아야겠죠? 각각 30점씩 배당된 팔굽혀펴기는 1분에 52회 이상, 윗몸일으키기는 58회 이상 기록해야 만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각종 관련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을 경우 별도의 가산점을 받을 수 있으니 자신이 갖고 있는 자격증이 해당되는지 꼼꼼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Q. 해병대 훈련소에서는 어떤 훈련을 받게 되나요?



Q. 해병대에 합격했는데 훈련 도중 부상을 당해 귀가조취 됐습니다. 다시 입대할 수는 없나요?


A. 입대 후 부상을 당해 귀가조취 된 병사들은 치유 기간에 따라 절차가 달라집니다. 먼저 치유기간이 3개월 미만이고 재입영을 희망할 경우 치유기간 경과일로부터 3개월 이내에 ‘귀가자 재입영 신청서’를 제출하면 입영희망시기를 반영해 선발 통지합니다. 단, 현역병 선발당시 모집분야의 소요가 있는 경우에 한합니다. 

한편 치유기간이 3개월 이상인 경우 또는 치유기간이 명시되지 아니한 경우 18세자는 입영 전 신분으로 관리되며 19세 이상자의 경우 치유기간이 경과된 후 또는 즉시 재신체검사를 실시하여 그 결과에 따라 병역처분 됩니다. 재신체검사 결과 현역병 입영대상자로 결정된 인원역시 마찬가지로 ‘귀가자 재입영 신청서’를 재출하면 됩니다. 




여러분, 해병대원이 되는 방법 잘 확인하셨나요?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이름답게 지원한다고 아무나 입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네요! 수많은 조건이 있지만 나라를 지키겠다는 열정이 가득한 지원자라면 얼마든지 합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시간에는 해병대를 사랑한 스타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릴 예정인데요. 어떤 이야기인지 궁금하시다면 5월 26일! 동고동락을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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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의 미 해병 포병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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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의 미 해병 포병대 -2- 



한국 전쟁중의 미 포병[육군]


중공군들이 사격을 잠시 멈추고 돌격선으로 기동하는 동안 포병 지휘관 제임스 캘린더 소령과 어네스트 페인 대위, 벤자민 리드 대위는 포대의 포들을 끌고 가던 포차에서 즉시 분리하고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운전병들은 트럭들을 전진과 후퇴를 재빠르게 반복하며 정차시키고 트럭들 사이에 야포 9 문을 포구를 중공군 쪽을 향해 방열하는 동안 포병들은 숨넘어 가는 속도로 포탄 운반 트럭에서 포탄 박스들을 옮겨 내렸다. 


트럭들은 졸지에 보병이 된 포병들의 방호벽 역할을 했다. 해병들은 전우의 시체와 부상병은 트럭에 태우고 신체가 건강한 장병은 차량 좌우에서 도보로 후퇴하던 상태였었다.


역사에 희귀한 포병과 보병의 직접 격돌하는 결투가 눈 덮인 이 계곡에서 펼쳐졌다. 적의 병력 규모는 보병 1개 대대. 그 부대가 노리는 것은 하갈우리에서 후퇴중인 미 해병 포병 2개 포대였다. 지난 2주간 중공군들이 집요하게 시도하던 인해전술 공격을 또다시 포병들에게 시도하는 중이었다. 


앞장에서 말한대로 중공군이 포병대를 공격 목표로 고른 것은 자기들이 공격할 때마다 악착같이 반격하던 미 해병 보병들과는 달리 중장비를 다루는 포병들은 자기들의 전매특허인 인해전술식 공격에는 취약하다고 본 것이었다. 


날이 완전히 환해지자 러슬 런 하사가 지휘하는 기관총반 사수들은 중공군이 철도를 향하여 떼지어 몰려오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일부 병력은 벌써 철도 둑에 도달하여 은폐하고 돌격 명령을 기다리기도 했다. 철도가 돌격 개시선이었다


리드 대위는 앞으로 돌출된 런 하사에게 그 기관총 진지를 도로 건너 뒤로 후퇴시키도록 명령했다. 그 도로 뒤에는 트럭 운전병만으로 구성된 부대가 도로를 방어물로 하고 방어선을 치고 있었다.


아래는 프랜시스 페리 대위의 회고담이다. 


“너무 급했습니다. 중공군들은 그 때 철도 둑 위로 머리를 들락거리며 돌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고 성질 급한 중공군 지휘관들은 철도 위로 뛰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


해병 포병들은 중공군들의 살기등등한 기세를 제압하기 위해서 먼저 포문을 열었다. 사거리는 불과 수 백 미터였다. 통상적인 간접사격이 아니라 포구를 내리고 조준경으로 적을 조준하며 쏘는 직접사격이었다.



미 해병 콜세어 전투기 - 장진호 전투에서 큰 기여를 했다.



9문의 포들은 포탄 박스에서 포탄들이 부산하게 꺼내져 장전 되는대로 계속 사격을 했다. 중공군을 제압 사격해서 철도 뒤에서 머리를 들지 못하게 박아 놓고 인해전술식 돌격을 못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포 다리를 제대로 펴고 포판을 땅에 박고 방열을 할 시간도 없었다. 사격 구역도 할당할 여유조차도 없는 돌발 상황이었다. 


포들은 마치 자동소총처럼 난사되었다. 난사에도 중공군은 기죽지 않았다.맹렬한 포사격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은 대대병력 전원이 철로 둑을 넘어 돌격을 개시했다. 포병들의 전방 시계는 흰색의 동계 전투복을 입은 중공군들로 가득 찼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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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 MAKETH SOLDIER]장병여러분! 패러디 사진 공모전에 참여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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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 MAKETH SOLDIER]

장병 여러분! 패러디 사진 공모전에 참여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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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비, 대한민국의 안전과 국민의 행복을 지키는 원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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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비, 대한민국의 안전과 국민의 행복을 지키는 원


국방부는 국방비의 주요 내용과 쓰임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적정 국방비 획득의 중요성에 대한 국민들과의 공감대 형성을 위하여 매년 국방비 홍보책자를 발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발간한 「국방비, 대한민국의 안전과 국민의 행복을 지키는 원동력」에는 향후 5년간 추진되는 주요 군사력 건설 사업과 적정국방비 규모가 최신화된 국방예산 통계자료와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국방부 누리집 간행물 부분에 게시된 전자책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국방비 홍보책자 전자책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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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e in Army] 군에서 유래한 다양한 발명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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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e in Army

군에서 유래한 다양한 발명품들


우리가 생활하는데 필요한 물건은 너무도 많습니다. 큰 가구부터 옷가지에 자잘한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내 주변의 수많은 물건들이 어디서 어떻게 유래됐는지 생각해 본 적 있으신가요?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많은 물건들이 바로 군대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요. 어떤 물건들이 군대에서 탄생해 우리 생활을 윤택하게 도움을 주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군 패션 아이템의 원조, 트렌치코트(Trench Coat)




요즘 젊은 세대들이 즐겨 입는 야상 재킷은 전투복인 야전상의에서 시작됐다는 것은 모두 익히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트렌치코트가 군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의외로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트렌치코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이 입었던 외투입니다. 여기서 트렌치(Trench)란 야전에서 몸을 엄호하기 위해 판 참호를 의미합니다. 야외에서 혹한의 추위나 악천후와 싸워야 하는 군인들에게 보온성과 방수성이 뛰어난 옷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 외투가 고안되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트렌치코트의 형태를 만든 사람은 토마스 버버리입니다. 그는 보온성과 방수성이 뛰어난 개버딘이라는 소재를 개발해 옷을 만들었습니다. 트렌치코트를 버버리 코트라고 일컫는 이유도 여기서 유래된 것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대중들은 일상에서 트렌치코트를 입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유명인들이 착용하면서 트렌치코트는 점점 유행이 번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트렌치코트는 이제는 군복이라는 인식을 완전히 털어버리고 다양한 색과 소재로 누구에게나 친숙한 멋쟁이의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부상당한 병사들을 위해 만들어진 카디건(Cardigan)




날씨가 쌀쌀한 초봄이나 가을에는 카디건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눈에 띕니다. 카디건은 앞이 트여있어서 입고 벗기가 수월한 니트웨어입니다. 이 카디건 또한 군에서 발명된 옷이라고 하는데요. 카디건은 영국의 귀족 카디건 가문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가문의 7대 백작, 제임스 토마스 브룬델은 1853~1856년동안 치러진 크림전쟁 당시 부상당한 병사들이 옷을 쉽게 입고 벗을 수 있도록 앞이 트인 니트웨어를 고안했다고 합니다. 이 옷이 편리하고도 멋있어 지금은 수많은 사람들의 머스트 해브 패션 아이템이 되었습니다.



폭격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GPS




내비게이션은 목적지까지의 정확한 거리 및 소요시간을 확인하고, 길을 안내하는 기능을 지닌 IT기기입니다. 오늘날에는 스마트폰, 태블릿 PC 등에서도 활용되며 점차 그 사용범위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이 내비게이션은 핵심 시스템인 GPS(Global Positioning System)에 의해 구동됩니다.  


원래 GPS는 미국 국방부에서 공중폭격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군사용으로 개발한 시스템입니다. 특정 목표물을 파괴하기 위해 수천 개의 폭탄을 일정 범위에 쏟아 붓는 융단 폭격의 정확도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낸 기술이죠. 이처럼 군에서 시작된 GPS 장치가 민간용으로도 보급되어 자동차 내비게이션 시스템뿐 아니라 국내 원양 항해선 등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소한 불편함이 생활을 바꾸다, 지퍼(Zipper)



지퍼는 단추를 일일이 채우거나, 끈을 묶지 않아도 의복이나 사물을 단 한번에 열고 잠글 수 있는 획기적인 발명품입니다. 지퍼의 시작은 바로 군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미국 시카고에서 군복무를 하던 저드슨이란 청년은 매우 뚱뚱했습니다. 그는 아침마다 허리를 숙여 군화 끈을 묶는 것을 무척이나 힘들어 했고 그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지퍼를 개발했답니다.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콜롬비아 세계박람회에 자신의 발명품을 출품했으나, 모양이 예쁘지 않아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스웨덴의 순드바크라는 사람이 좀 더 발전된 형태의 지퍼를 개발했고 1917년 이 제품이 군복과 비행복에 채용되면서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923년 쿤 모스라는 양복점 주인이 옷에 사용할 수 있는 지퍼를 개발하면서 지퍼의 전성시대가 열렸습니다.  



거부감을 이겨낸 편리함, 손목시계



패션의 완성인 손목시계 또한 기동성과 신속성이 요구되는 군대에서 탄생했습니다. 1900년대 남자들은 손목에 무엇인가 찬다는 것을 매우 여성적이라고 생각해 터부시했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확인할 때 회중시계를 주머니에서 꺼내 보곤 했답니다. 그러나 군에서 포격 시 포병들이 발사 간격을 측정하는 과정에서 번거로움을 느끼고, 회중시계를 손목에 연결해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 후 이런 습관이 굳어져 손목시계가 탄생했고, 이 발명품이 대중에게 점차 확산되어 오늘날과 같은 유행이 됐다고 합니다. 


군대에서 유래된 발명품들의 에피소드, 알고 보니 참 신기하죠? 이외에도 군에서 처음 적용돼 사회에 전파된 물건들은 다양합니다. 또 어떤 것들이 있을지 다음 기회에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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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대가이드-군종병]꿀 같은 황금연휴, 불교 군종병이 잠 못 이루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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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 같은 황금연휴,

불교 군종병이 잠 못 이루는 이유는?

 


 

20155월 25일은 음력으로 4월 8, ‘초파일이라고도 불리는 석가탄신일입니다. 석가탄신일은 2,500여 년 전 인도에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부처를 이루신 싯다르타 태자가 태어난 날입니다. 더구나 올해는 주말과 맞물린 황금연휴가 되어서 사찰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에 따라 국방부 예하 각급 부대의 불교 군종병들도 부처님 오신 날 준비에 여념이 없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 불교와 군대에 얽힌 몇가지 에피소드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의 스페셜 메뉴?

달달한 간식이 간절한 병사들에게 휴일에 진행되는 종교행사는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와도 같습니다. 종교별로 나오는 간식의 종류와 양이 매주 달라 종교행사를 앞둔 병사들은 군종병들에게 간식에 대한 정보를 미리 탐문하곤 하는데요. 특히 크리스마스와 함께 ‘2대 종교행사로 손꼽히는 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소위 두돈반 트럭을 여러 대 동원해야 할 만큼 불교 신자가 갑자기 늘어나곤 하죠.

 

10여년 전 군 복무를 하신 분들도 석가탄신일에 무려 O리아에서 직접 가져온 햄버거에 얼음을 띄운 콜라가 나왔다는 어마어마한 추억(?)을 이야기할 정도랍니다. 당시 석가탄신일 행사에 참석했던 군인들이 보였던 열광적인 환호는 마치 콘서트장의 그것을 무색케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특히 이날 햄버거가 간식으로 제공된다는 첩보를 입수한 다수의 무교 및 다른 종교를 믿는 군인들까지 참석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죠.

 

무사고 법회를 위한 불교 군종병의 야근은 계속된다, 쭈욱~

연휴를 앞두고 기분이 한껏 들뜬 장병들과는 달리 전 군의 불교 군종병들은 석가탄신일 행사 준비에 분주해집니다. 불교계 최대 행사인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 행사 인원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 뻔한 터라 준비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법당 내 자리가 협소할 것에 대비해 외부에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물론 안내 자원봉사자 확보, 집회 프로그램 확정, 간식 준비, 각종 이벤트 및 포상 기획 등 챙겨야 할 것이 너무 많아 정신이 없을 정도랍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전 군의 불교 군종병들의 야근(?)’이 당연시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이 군종병들의 사명감은 정말 남다르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군복무 중에도 수행하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이죠!

 

 

우리나라 군종제도 및 군종병의 역사, 임진왜란 vs 6·25전쟁

그렇다면 군대 내 병사들의 종교활동을 지원하는 군종병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요? 일부 역사학자들은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을 이끌고 나라를 위해 싸운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사명대사를 군종제도 및 군종병의 시초라고 주장합니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이끌고 온 승려들이 군 곳곳에 배치돼 법회를 주관하며 자연스럽게 군 내 종교활동을 전개했다는 설명입니다. 당시 승병들은 전쟁에 지친 군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마음의 안정을 찾아주는 한편 전사한 군인들의 장례를 주도하는 등 국난(國難)을 극복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반면 정식으로 군종제도가 도입된 것은 1950925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 날은 바로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해당 제도를 승인한 날이고, 대한민국 역사에 공식으로 기록된 군종제도의 시작점이 바로 이때이기 때문이죠.

 

우리나라 군종제도 도입의 배경에는 이처럼 민족의 아픈 역사인 ‘6·25전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치열한 전쟁의 와중에 미군 부대에 근무하던 한 카투사 병사가 이 대통령에게 진정서를 보내, 군종제도 도입의 필요성을 호소했고, 그 호소가 받아들여져 제도가 시행되게 된 것입니다.

 

이후 제 1대 군종실장이 임명되었고, 현재는 제 30대 이호열 목사가 대한민국 군대의 종교 활동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민족의 아픈 역사와 함께 시작된 군종제도가 어느새 65년째를 맞고 있습니다. 그동안 국방부는 군종제도를 꾸준히 보완해 현재는 군종정책과에서, 기독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 등 모든 종교를 망라한 496명을 군종장교로 임명해 장병들의 신앙생활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깨알 상식> 전 세계 군종제도 운영 현황은?

현재 군종제도를 운영하는 국가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총 44개국입니다. 이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 아시아(7개국) - 한국, 태국,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이스라엘, 아르메니아 ▲ 유럽(29개국) - 프랑스, 독일, 영국, 스웨덴, 스페인, 스위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폴란드,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벨기에, 크로아티아, 체코, 헝가리, 아일랜드, 그리스, 보스니아, 라트비아, 사이프러스,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 미주(5개국) - 미국, 캐나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 아프리카(3개국) - 남아프리카공화국, 가봉, 짐바브웨 등이 군종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궁금한 군종병의 모든 것


1. 군종병의 역할

첫째, 장병들의 사기 진작 및 직접 전투 참여

둘째, 장병 각자의 신앙적 믿음을 위한 종교의식 지원

셋째, 장병들에게 전장윤리 교육 지원

넷째, 부상 장병들의 영적·심리적 건강회복 지원

다섯째, 전사자들에 대한 장례의식 지원

 

2. 군종병 지원자격과 절차 :

 지원자격 바로가기

군종병은 18세 이상 28세 이하, 신체등급 1~3급 현역병 입영대상자에 한해 지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군종병은 전문특기병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특수한 자격과 면허, 전공 또는 경력을 필요로 하거나 선발자들의 전문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별도의 지원자격이 필요합니다

종교별 세부지원자격

 ▲ 불교 군종병 - 불교 관련 전공학과 1년 이상 수료자 또는 수계 받은 지 5년 이상자, 신앙생활 5년 이상자인 경우  ▲ 기독교 군종병 - 관련 종교 전공학부(신학과 또는 신학전공) 2년 이상 재학 또는 세례 받은 지 10년 이상자

 ▲ 천주교 군종병 - 신학생 또는 영세 받은 지 5년 이상 지난 자로 본당 신부 추천서 제출자 또는 전국 가톨릭신학대학 및 대학원 신학과 재학 및 졸업생

 

 지원절차 바로가기

 단계

내용 

 1단계(관련정보 습득

 병무청 홈페이지 접속 모병센터 모집안내 서비스 안내 및 지원절차

 육군 전문특기병 군사특기임무 및 설명

   이외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 확인

 2단계(지원서 접수)

 병무청 홈페이지 접속 모병센터 군지원서비스 지원서 작성 후 접수

  접수 취소는 발표 10일 전까지 가능

 3단계(구비서류 제출

 응시지구 지방병무청에 구비서류와 수험표 제출

  병무청 홈페이지 모병센터 -담당자 전화번호 및 주소

 4단계(서류 전형 확인)

 1차 서류전형 합격 여부 확인

  * 1차 전형 특기만 해당

 5단계(면접 및 신체검사)

 1차 무전형 특기 지원서 접수 완료 시 수험표에 면접신체검사 일정 기재 

 △1차 전형 특기 1차 합격여부 확인 시 수험표에 면접신체검사 일정 기재

 6단계(최종합격 여부 확인)

 병무청 홈페이지 모병센터 군지원서비스 합격여부 확인 후 입영통지서 출력 

  * 본인 이메일에서 출력


 

석가탄신일에 고생할 불교 군종병들에게 응원을 보내며, 소개해드린 군종제도와 군종병에 대한 다양한 정보 재밌게 보셨나요? 다음에 또 다른 재미있는 정보와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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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의 미 해병 포병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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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의 미 해병 포병대 -3-


생사기로가 눈앞에 어른거리는지라 각 포병들의 포사격도 필사적이었다. 포가 정렬된 도로 후방은 금새 화약 냄새로 가득 찼다. 


포병들은 시간이 없어서 포의 방열을 물론 언 땅에 포다리를 제대로 고정시키지도 못했다. 각 야포의 포수들은 포 다리에 달려들어 온몸으로 발사 시의 반동을 흡수해서 포의 후퇴를 최소화시켰다. 


그래도 포탄을 발사할 때마다 포는 포병들을 매달고 뒤로 수 미터씩 후퇴하였다. 몇 발을 발사하면 포병들은 포를 앞으로 밀어내서 원위치해서 사격을 하고 또 매달려서 뒤로 후퇴했다. 


난사라고 표현할 만큼 정신없는 사격 속에서 포탄을 가리고 자시고 할 여유도 없었다. 포병들은 그저 포탄 박스 안에서 황급히 꺼낸 탄들 손에 닿는대로 발사하였다. 


돌격하는 중공군에게 퍼부어진 포탄들은 각양각색이어서 고폭탄, 대전차 고폭탄, 백린 연막탄 등 닥치는 대로 폐쇄기에 장전하여 몰려드는 중공군들에게 발사했는데 근거리 사격이라서 폭발한 포탄 파편들이 포병 진지까지 날아왔다. 


해병들의 장진호 철수


그러나 포병들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장전과 사격과 포의 원위치 이동을 계속하였다.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중공군이 물 뿌리듯이 쏴대는 따발총의 총탄이 주변에 마구 날아들며 포병 여러 명이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다.


그러나 총탄이 아니라 포탄의 소나기를 맞은 중공군의 피해는 훨씬 더 컸다. 근거리에서 포탄의 불벼락을 뒤집어쓰고 숱한 중공군들은 비명 속에 죽어나갔다. 누비옷을 입은 중공군의 사지가 잘려서 사방으로 날아가고 절단된 신체가 공중으로 튀어 오르기도 했다. 


처절한 비명과 시체 토막이 주변에 무더기로 난비하자 중공군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피해가 워낙 커지자 중공군 지휘관은 안 될 전투라고 판단하고 후퇴 나팔을 불어 누더기가 된 부대를 모두 철도를 넘어 산으로 퇴각 시켰다. 도망치는 중공군의 뒤를 간접사격으로 사법을 바뀐 포병들의 포탄들이 간격을 두지 않고 뒤따르며 연타를 가했다.


공격을 개시한 중공군 대부대에서 신체가 멀쩡하게 후퇴한 생존자들은 소수였다. 중공군이 퇴각한 뒤 해병 포병대가 전장 정리를 하면서 세어보니 처참하게 죽은 중공군의 사체가 500구가 넘었다. 해병 보병들이 아니라 포병들에게 돌격하다가 포탄들에 당했기 때문에 갈기갈기 찢어진 사체들 태반이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상태였다. 


미 해병의 G포대와 H포대가 짧은 시간 동안 돌격하던 중공군에게 발사한 포탄은 총합계, 600발 이상이었다. 해병대의 사상자는 전사 3명과 34명의 부상자뿐이었다. 


전투 지휘를 했던 페리 대위는 이 전투를 이렇게 자체 평가하였다. 

“포병 전투사에 야전 포병이 돌격하는 보병들을 상대로 그런 엄청난 전과를 거둔 적이 없었습니다.” 


해병 포병대는 보병 전투에서만 실력을 발휘한 것이 아니었다. 포병대는 사단 사령부가 위치해 있었던 하갈우리에 주둔하고 있었다.


전방 유담리로 진출한 해병 2개 연대와 하갈우리를 잇는 좁은 길의 중간에 덕동고개라는 요지가 있었다. 이 곳을 해병 1개 중대가 점령하고 있다가 11월 27일 중공군 연대 병력의 공격을 받았다.


해병 1개 중대는 닷새간의 영웅적인 전투를 전개해서 중공군의 공격을 분쇄하고 이 고지를 지켜내 유담리 진출 해병 2개 연대의 철수를 가능케 했다. 이들의 방어 성공은 포사격의 극한 거리인 10km나 먼 원거리 후방 하갈우리에 있었던 해병 포병대의 정확한 사격에 크게 힘 입은 바 있었다.


이 포병대는 또 11월 28일 해병 본부가 있던 고토리에 가한 중공군의 대병력을 격퇴함에도 큰 활약을 했었다.


포병대의 전투 후 해병대는 고토리에 도착했고 거기서 다시 남쪽의 진흥리로 철수해서 마침내 중공군의 마수에서 벗어났다. 해병대는 트럭 일천여대에 해병들은 모든 군수품과 부상자와 전사자의 사체까지도 대부분 다 데리고 나왔다. 


이 장진호 전투에서 강인한 해병들은 미 8군 육군이 서부 전선 평안도에서 당했듯 와해된 중대 단위 소부대가 단 하나도 없이 중공군을 격퇴하고 생존하였다.


미 해병대의 2주간에 걸친 장진호 철수 작전에서 격렬한 전투를 수십 회를 되풀이 했는데도 해병대의 전사자는 700명에 실종자 200명의 손실만을 입었다. 반면 중공군의 전사자는 거의 투입병력 절반에 달하는 2만 5천명 전사와 부상자 1만 2천 500명의 대손실을 당했다.


더해서 해병의 철수 작전 동안 미 해병대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잔혹한 추위는 방한 장구가 부실했던 중공군 대부분을 동상 환자로 만들어 버렸다.

 


해병대의 철수


장진호 전역에 동원된 중공군은 대규모 화력에 붕괴되는 부대나 입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대병단의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결국 몸만 망치고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었다는 것이 장진호 전투 뒤에 중공군에게 내려진 전사가들의 평가였다. 그들이 쫓던 해병대가 흥남 부두를 떠나고 나서도 만신창이가 된 중공군 9병단은 다음 작전들에서 제외되어 4개월이나 함흥 평야에 머물며 휴식과 재정비만을 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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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대학살 - 중공군 대패의 춘계공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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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이 만신창이가 된 상황인지라 팽덕회는 주저했지만 모택동의 압력은 거셌다. 서부 전선의 50군과 112사단이 전진하는 미군을 막아 내는 동안 39군과 40, 그리고 42군은 동부 전선으로 이동을 명했다중공군의 사[]는 한국군의 사단(師團), ()은 한국군의 군단(軍團), 집단군(集團軍)은 한국군의 군()에 해당한다중공군은 26일 서부전선에서 횡성지구로 이동해 한국군 11사단에 타격을 가하고 양평군 지평리에서 미 7연대와 프랑스군 대대를 포위했으나 미군과 프랑스군의 막강한 방어력에 제대로 공격도 못하고 대치 중에 미군 기동부대가 구출을 위해서 달려오자 맥없이 후퇴하고 말았다.

 

이 전투와 한강 이남에서 진격하는 미군들과 [기습의 효과가 사라진] 전투를 해 본 팽덕회는 미군들이 종이 호랑이가 아니라 마음만 먹는다면 공격이건 방어건 마음대로 해낼 수 있다는 것을 피부로 실감했다그러나 서울을 내놓고 북쪽으로 철수한 팽덕회는 본국에서 계속 새로운 대부대가 도착하고 포병대까지 도착하자 모택동의 바람대로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주도권을 노리고 대공세를 기획하게 된다. 이번 새로운 작전의 목표는 대전과 안동을 잇는 선까지 진격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잠시 이야기를 벗어나 말을 해보자. 2차 세계 대전 중 히틀러가 일선 부대의 작전에 일일이 개입했다가 독일군 멸망의 결과를 가져왔는데 모택동도 허욕과 전선 정보도 시원치 않은 상황에 과욕을 부리는 바람에 중공군의 대병력이 다음 5차 전역에서 몰사를 하게 됐다는 점에서 그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실수를 하였다그러나 중공군은 근대 전에서 주요 요소인 보급 또는 병참이라는 문제를 너무도 경시했다.

 

개전 이래 미군 공습으로 파괴된 중공군의 트럭만 3,400대나 되었다. 그래서 이런 대규모의 전역을 개시하면서 중공군이 아쉬운 대로 찾은 보급 방식은 사람이 끄는 수레 7,500대와 말이 끄는 2,000대의 달구지 동원이었다. 수나라 때 고구려를 친 수양제의 보급 방식과 다르지 않았다. 이것은 아무리 보아도 현대의 대군이 대규모 작전을 전개하기에 너무 한심한 병참체계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중공군은 겁 없이 공격 전투에 뛰어 들었다. 적을 우습게 본 교만의 작전 심리학 때문일 것이다. 중공군이 계속해서 한반도로 증강되고 한반도에만 중공군의 숫자가 백만 명이 넘자 조심스러웠던 팽덕회는 드디어 1951422일 대공세 펼쳤다. 전선에 투입한 병력만 50만 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유명한 5차 전역[五次戰役]의막이 올라간 것이다. [한국 쪽에는 중공군의 일차 춘계[春季] 공세라고 부른다.]

 

이렇게 압도적인 병력의 태풍을 휘몰아치는데 감히 이에 맞설 적군이 있겠는가하는 자만심을 모두 갖게 만들기에 충분한 공격이었다. 더구나 작전 개시 불과 열흘 전 맥아더와 앙앙불락하던 트루먼411일 맥아더를 해임시켜 버렸다. 팽덕회로 보면 승리를 예견하는 기분 좋은 전조였다.

 

 

 

중공군 5차 전역 - 붉은 화살이 중공군 공격 병력의 규모룰 말해준다.

  

 

전략은 서울의 재탈환이 아니라 중부전선에 큰 타격을 입히고 한국을 동서로 양분한 뒤에 남진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희망적인 일차 목표는 모택동이 원했던 대전과 안동선이었다. 이번 작전의 특징은 대부대 이동선과 병참선이 일단 서울 북방에서 비스듬한 하향선을 그으며 남동쪽 한강 상류 쪽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422일 황혼 무렵 38선 전 전선에서 포성이 진동했다. 중공군은 한반도 남부 석권을 노리는  대공세를 발령하였다. 좌익 돌파부대인 제40군이 쾌조의 진격 속도를 보였고 다른 20, 26, 27군이 쾌조의 진격을 보여 남한 영토 15킬로 이내까지 진격했다.

 

서부전선 임진강에서도 중공군은 공세의 포문을 열었다. 한편 63군과 64군은 십 여 개의 임진강 도하점으로 넘어 진격을 개시해 영국군 그로스터 연대의 일개 대대에 심대한 타격을 주고 섬멸해 버렸다. 영국군이 패전한 뒤 동남으로 이동한 이들의 공격으로 한국군 6사단이 사창리에서 큰 손실을 보았다. 반면 한강 하류에서 한국군 1사단을 공격했던 64군은 한국군과 미군의 선방과 미군 73탱크의 화력으로 공격이 돈좌되어 64군 사령관등과 일부 간부들이 해임되는 사태까지 보였다.

  

 

영국군 그로스터 연대

  

 

전역이 마무리 되는 5월 초, 팽덕회 사령부에서 중공군 간부들 회의가 있었다. 공격의 결과로 의정부, 가평, 춘천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얻었지만 그들의 목표와는 너무나 차이가 있었다. 대량 동원했던 병력 규모에 비하면 그 성과가 기대 이하였다. 이미 충분한 준비를 하고 있는 유엔군은 아무 생각없이 북상 하다가 호되게 당했던 그 전의 유엔군이 아니었다. 대전- 안동선의 점령은 커녕 유엔군이 질서 있게 철수해 버려 한강 북쪽 일부를 점령하는 정도의 흐지부지한 결과만 얻을 수가 있었다. 이미 이 때 미군과 한국군은 중공군의 전략을 읽어 중공군이 공격해오면 포병 화력으로 최대한 타격을 하면서 질서 있게 후퇴를 했다가적의 보급이 떨어질 때쯤 되면 반격으로 반전하여 공격을 했다.

 

중공군 간부들은 이렇게 해서 후퇴한 적군들이 일부는 한강 이남에서 반격을 노리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공격은 최대의 방어였다. 회의는 다시 한 번의 공격을 하자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일차 전역에서 이미 병참 물량을 다 소비했는데도 결과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대규모 전역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발상은 무리였다그러나 그 때까지도 중공군 간부들은 수의 마술, 즉 병력만 왕창 동원해서 적을 덮치면 적은 무너진다는 잘못된 신념에 헤어 나오지 못했다.

 

 

미군 155밀리 롱 톰 장거리포의 포격 - 1951 봄, 서울 북방

 

 

 

5차 전역의 2단계,한국군이 2차 춘계공세라 부르는 이 전투의 목표는 여전히 거창했다. 북한강 이서 지역의 미군 3개 사단, 영국군 터키군의 3개 여단, 한국군 1,6사단을 섬멸하고 제천 단양으로 진격하는 옹골찬 목표가 다시 설정되었다.

 

 

팽덕회

 

 

 

작전은 새로이 인민군 제1군단이 배속된 제19집단군이 추가로 동원되어 경기도 고양에서 청평쪽으로 진격하고,한편 제9집단군과 제3집단군, 북한군 일개 집단군이 춘천 일대의 동쪽 전선으로 이동하였다. 그저 병력만 늘이면 다 된다는 전쟁 철학이 다시 여기서도 빛을 발했다1951516일 황혼 무렵이었다.

 

5차 전역 2단계 대공세가 문을 열었다. 한국군에서 이를 2차 춘계 공세라고 부른다. 유엔군의 전선이 여러 곳이 뚫렸지만 중공군 사령부에서 보아도 초장부터 작전이 제대로 되어 가지 않는 것이 느껴졌다. 중공군 간부 중에 지각있는 지휘관들은 한국 중부 전선에 엄청나게 투입했던 병력이 뒤섞이고 엉켜 엉망이 되어 작전 지도가 안되고 항공 공격에 부대가 노출 되는 것을 불안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중공군이 전가의 보도로 휘둘러대던 인해전술이 그 한계를 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조금의 진격은 가능했지만 미군과 한국군은 발 빠르게 후퇴해버렸다. 작전이 개시되고 불과 나흘도 안 되어서 9집단군과 3집단군의 사령관 등은 식량 고갈의 위협이 눈앞에 보이자 드디어 팽덕회에게 작전 중지를 건의했다팽덕회도 낙심천만이었지만 할 수없이 이의 검토를 할 수밖에 없었다. 식량이 거의 떨어져 63군 군장이라는 부 숭벽[傳崇碧]조차 뽕나무 잎을 끓인 물을 밥 대신 먹어야 했다.

 

이때 1개월 전부터 중공군의 틈을 노리고 있던 유엔군은 비로소 일제 반격에 나섰다. 미군은 이들이 지난달 422일 공격을 위한 중공군의 부대 이동을 항공 정찰로 철저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한국군의 정찰대를 투입해 추가 정보를 수집했었다. 그리고 반격의 기회를 엿보던 미군에게 중공군은 2단계 작전을 전개하면서 허점을 보였다. 좁은 지역에 너무 무리하게 동원하였던 대 병력이라 은폐가 힘들었다. 서부 전선에서 중부 전선으로 긴 행렬의 인간과 우마차의 이동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노출됐다.

 

수송력의 부족은 길디 긴 손수레와 마차 대열을 서부에서 중부 전선으로 끊임없이 이동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속도도 늦고 적재량도 적었으니 수많은 수레가 움직여야 했다. 그러니 고구려를 정벌하러 나섰던 수나라식 수레 부대가 미군의 항공 정찰에 노출되지 않을 수 없다작년 30만이나 되는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침투해 들어올 때에는 완전 기도비닉이 이루어져 미군에게 발각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물량이 너무 많았고 시간을 다투었던 이유도 있었다. 또 미군에 대헤서 느슨해진 경계심이 이런 주의성 없는 모습을 노출한 듯하다.

 

미군은 중공군 후방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무질서하게 이루어지는 부대와 수레의 비스듬한 소시지 행렬을 지켜보다가 차기 작전의 틀을 짰다횡으로 길게 늘어진 인원과 물자의 보급선 중 목 부분을 그대로 절단해 한반도의 중공군을 동서로 갈라놓자는 작전이었다중국이 무리하게 전개한 작전에서 획득했던 중공군 포로들로부터 이들이 보급은 물론 식량이 큰 부족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미군 9군단과 10군단은 적군의 보급이 바닥 날 무렵인 522일 전차 200대를 주축으로 보병과 장갑차들로 이루어진 태스크 포스를 앞세워 번개와 같은 반격에 나섰다. 실로 태풍 같은 화력의 역습이었다.

 

기갑의 공격은 적의 섬멸을 목표로 하는 포병과 달리 그 기동력으로 적의 급소를 찔러 붕괴 시키는 것을 목표에 둔다기록을 보면 이번 반격은 바로 이 원칙에 충실하게 적에게 숨 쉴 여유도 주지 않는 가차 없는 기동과 돌파의 압박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 전략의 성공에는 스피드가 중요하다.

 

 

 

 

1950년 혜산진에서의 M 4 탱크

 

10군단장 알몬드는 헬리콥터를 타고 선두에서 전차부대의 돌격을 지휘했다. 만약 어떤 이유에서건 전차 부대가 정지하거나 기동이 느리면 그는 지상에 착륙하여 불호령을 내렸다무턱 댄 돌격 같아 보였던 태스크 포스의 공격은 그 결실을 거두었다. 200여 대의 전차들이 살갗을 찢고 뼈를 베어버리 듯 대군인 중공군 안으로 마구 뚫고 들어오자 턱없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적의 무지막지한 전차 육박에 중공군은 지휘와 통신 병참의 모든 신경계통과 순환계통이 토막 나서 문자 그대로 기갑부대의 목표인 붕괴 상태로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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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켓 엔진을 통해 본 냉전시대 [ 3 ] 미국의 오만과 소련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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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켓 엔진을 통해 본 냉전시대 [ 3 ] 미국의 오만과 소련의 침묵

 

 

소련은 당시까지 핵 투발 수단으로써 유일하게 사용 할 수 있는 장거리 중()폭격기 분야에서 미국에게 분명히 뒤쳐져 있었다. 때문에 대륙을 횡단하고 대양을 건너 적을 타격 할 수 있을만한 로켓을 보유한다면 그 동안 미국에 비해 부족하였던 장거리 타격수단을 일거에 만회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고 더욱 개발에 전력을 기울였다.

 

[ 1947년 초도 비행에 성공한 YB-49

폭격기분야에서 미국의 자신감을 엿 볼 수 있다 ]

 

폭격기 분야는 소련이 미국에 비해 기술력이 객관적으로 뒤졌기에 이를 단시일 내 만회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지만, 백지상태에서 시작한 장거리 로켓 분야는 개발을 미국과 소련이 거의 동시에 출발하는 상태라 기술력에서 그리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보수적인 소련의 군부는 폭격기와 같은 전통적인 무기에 대해 관심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 소련의 초창기 SSMSS-1 SCUD ]

 

어쨌든 그런 속내와 상관없이 표면적으로는 앞선 독일의 로켓 기술을 소련보다 먼저 그리고 많이 선점한 미국이 이러한 경쟁에서 앞서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당시 소련의 능력이 그리 뒤쳐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전쟁 당시에 갑자기 등장하여 서방을 놀라게 하였던 MiG-15처럼 소련의 항공 역학 관련 기술은 예상보다 뛰어났다.

 


[ MiG-15의 등장은 소련의 놀라운 기술력을 똑똑히 알려준 예였다 ]

 

다만 미국은 그러한 소련의 기술력을 애써 무시하거나 심리적으로 밀리지 않기 위해서 평가절하하기에 바빴을 뿐이었다. 미국이 장거리 로켓과 관련된 소련의 기술력을 막연히 뒤쳐졌다고 인식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 분야와 관련한 내용을 소련 당국이 구체적인 성과가 나올 때까지 철저히 비밀주의로 일관하여 제대로 된 정보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서방측의 평가절하에 대해서 소련은 철저하게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V-2를 역설계하여 제작한 소련 최초의 장거리 로켓 R-1의 발사모습) ]

 

반면 미국은 새로운 로켓이 개발되어 실험에 성공할 때마다 선전 매체를 통하여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는데 이것은 제2차 대전 후 미국만이 세계를 이끌어 나가는 유일 축이라는 오만한 편견이었다. 미국은 소련을 무시하다보니 장거리 로켓 분야에서 오로지 그들만이 독보적인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며 만용을 부렸던 것이었다.

 


[ 미국은 그들의 업적이 나올 때 마다 선전하였다 ]

 

한마디로 미국은 MiG-15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MiG-15의 등장 당시에는 미국에서 개발하였던 F-86이라는 불세출의 대응기가 있어 그 충격을 신속히 완화시킬 수 있었지만 로켓은 그러하지 못하였다. 결론적으로 나중에 소련이 그들의 성과를 막상 선보였을 때 이에 즉시 대응할만한 수단이 없던 미국은 순식간 충격과 절망에 빠졌다.

 

[ F-86MiG-15의 충격을 완화시켰지만 로켓 분야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

 

소련은 제2차 대전 기간 중 최고의 병기중 하나인 카추샤 다연장로켓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였을 만큼 나름대로 로켓과 관련한 기본적인 기술력이 있었다. 하지만 전후 장거리 로켓을 개발하는데 있어서는 소련 또한 미국처럼 많은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대추력을 낼 수 있는 엔진의 개발이 지지부진하였기 때문이었다.

 


[ 소련도 차세대 로켓 엔진의 개발에 애를 먹고 있었다 ]

 

로켓을 장거리로 날리기 위해서는 많은 연료를 탑재하여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로켓의 크기가 당연히 커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크기가 커질수록 무게가 무거워지므로 더욱 강한 엔진이 필요하였다. 결국 엔진의 성능을 키워야 하는 문제는 장거리 로켓 개발의 핵심으로 떠올랐고 미국도 소련도 고성능의 로켓 엔진을 개발하는데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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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라면' 당연히 귀신잡는 해병대 아니겠어?(대한민국 최고의 특수부대 해병대원으로 거듭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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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라면’ 당연히 귀신 잡는 해병대 아니겠어? 下(하)

대한민국 최고의 특수부대 해병대원으로 거듭나기



저번 시간에는 해병대에 입대하는 방법을 알아봤는데요. 많은 도움이 되셨나요? 남자라면 누구나 해병대를 꿈꾸기도 하지만, 그만큼 두려운 존재이기도 합니다. 훈련이 어렵고, 혹독하다는 소문이 많아서 일 텐데요. 최근 이러한 편견을 깨주는 사례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삶을 누리는 스타들이 해병대에 자원입대를 할 뿐만 아니라 군 생활을 하면서 진심으로 해병대를 사랑하게 된 경우가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인들은 그런 스타들을 보며 해병대를 더욱 친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스타들의 해병대 이야기!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함께 만나러 가보시죠! 





해병대는 내 운명, 스타들의 해병대 사랑


<남진>

어릴 적 동경의 대상이었던 ‘빨간 명찰’을 가슴에 새기다

남진이 해병대에 입대한 1968년은 그가 소위 ‘인기가수’로 한창 잘 나갈 때였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인기를 누리던 남진이 해병대에 입대한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은 의구심을 드러냈습니다. “왜 하필 해병대를 지원했느냐”는 질문에 남진은 “해병대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내 동경의 대상이었다”고 답했습니다. 특히 남진은 1969년 7월 청룡부대 2대대 5중대 2소대원으로 베트남에 파병되기도 했는데요. 그야말로 해병대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흥국 & 이정>

해병대가 맺어준 새로운 가족, 이것이 바로 ‘해병의 情’

대한민국 해병대하면 바로 이분이죠. ‘으아~내가 바로 해병대야’란 유행어가 지금도 생생히 들리는 것 같습니다. 김흥국은 방송에서 늘 해병대를 다녀왔다는 사실이 가장 자랑스럽다고 얘기하곤 했죠. 해병대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김흥국의 양아들’로 유명한 가수 이정도 해병대를 다녀왔습니다. 이정이 해병대를 지원하게 된 계기가 사뭇 재밌는데요. 한 방송에서 김흥국이 이정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남자라면 군대는 해병대를 다녀와야지?”라고 하는 바람에 해병대를 지원했다고 합니다. 김흥국과 이정은 연예계 최초 해병대 출신 부자(물론 진짜 부자는 아닙니다^^)로 방송가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습니다.  


<오종혁>

전역까지 미루고 동기들과 혹한기 훈련받은 ‘진짜 사나이’

아버지에 이어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가수 오종혁이 9시 뉴스에 등장했습니다. 모든 군인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전역 일을 한 달 가까이 미루면서 혹한기 훈련을 받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오종혁은 “2년 동안 함께 동고동락한 전우들과 마지막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라며 혹한기 훈련 참여 의지를 전했습니다. 가장 힘든 훈련으로 악명이 높은 혹한기 훈련까지 받겠다는 오종혁 해병의 전우애야말로 ‘진짜 사나이’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인 것 같습니다.    



진정한 해병이 되려면 해병대만의 전통을 따르라!

병역을 기피하는 스타들이 많은 요즘, 위와 같이 ‘해병대’라는 자부심을 느끼며 국방의 의무를 훌륭히 소화해 낸 스타들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해병대에는 어떠한 매력이 있기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해병대만의 특별한 전통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당당한 해병이 되기 위해 꼭 거쳐야 할 이색 전통을 소개합니다!




설레는 첫 휴가, 어머니에 대한 감사함을 되새기는 ‘사모곡’ 열창 

입대 후 처음으로 떠나는 휴가. 지금 돌이켜봐도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설레는데요. 해병대의 첫 휴가는 조금 특별합니다. 바로 어머니를 만나는 순간,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무조건 ‘사가(사모곡)’를 열창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당당한 해병대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건강하게 키워주신 어머니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생긴 전통이라고 합니다. 지난 2009년 가수 이정은 자신을 마중 나온 어머니를 지하철에서 만나자마자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꼭 첫 휴가가 아니더라도 지금 당장 어머니께 감사의 마음을 전해보는 건 어떨까요?

이정 첫 휴가 지하철 사모곡 동영상 바로가기





이순신 장군님께 전역을 신!고!합니다 

무사히 군 복무를 마치고 전역한 해병대원들이 반드시 향하는 곳. 바로 광화문 사거리입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군인’으로 손꼽히는 이순신 장군님께 전역 신고를 하기 위해서인데요. 광화문 사거리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 동상을 향해 전역 신고를 하고 군가를 제창한 후에야 ‘진정한 전역’을 인정받는다고 합니다. 단, 강제성은 없습니다. 하지만 지나친 고성방가 등으로 일부 시민들이 불편을 호소하는 일도 있다고 하니 서로 조금씩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진정 멋진 해병대원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대한민국 해병대의 어제와 오늘

대한민국 해병대(Republic of Korea Marine Corps/ROK Marines, ROKMC)는 대한민국 해군 예하에 편성되어 있는 부대입니다. 해병대는 국가전략기동부대로서 상륙 작전을 주 임무로 수행하는데요. 현재 K1 전차와 K9 자주포 등의 기갑 장비와 상륙돌격장갑차(KAAVP7A1) 등 최신 상륙 장비를 갖춘 특수부대로 성장했습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지리적 여건과 여수 10·19 사건의 전훈에 따라 수륙양면 작전의 필요성이 높아지며, 군은 지난 1949년 4월 15일 진해 덕산 비행장에서 상륙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해병대를 창설하게 됐는데요. 같은 해 5월 5일 대통령령 제88호로 해병대령이 공포되며 해병대의 역사가 공식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합니다.  


당시 초대 사령관 신현준 중령 휘하 380명은 해군에서 편입한 장교 26명과 하사관 54명 그리고 병 300명(해군 13기에서 특별 모병한 해병대 병 1기생)으로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가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 한다’는 해병대 정신으로 해병대의 굳건한 초석을 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949년 8월 1일 해군으로부터 장교와 부사관을 증원 받고‚ 해군 14기 중 440명을 해병대 병 2기로 추가 특별 보병하며 해병대는 2개 대대 규모로 증편하게 됩니다. 


이후 해병대는 6·25전쟁과 베트남전을 비롯해 다양한 전쟁과 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특수부대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특히 혹독한 훈련으로 유명한 해병대는 지금까지도 전군에서도 손꼽히는 높은 훈련 강도를 자랑하는데요. 이러한 훈련을 오롯이 견뎌낸 해병대원들의 자부심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현재 해병대는 2개 사단, 1개 여단, 연평부대, 제주방어사령부 예하 해병부대, 진해 해군기지사령부 육상경비대대, 부산 가덕도 해병경비대 및 사령부, 교육훈련단, 지원부대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군대라는 새로운 조직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으로 입대를 앞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군 생활을 편하게 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이런 어려움에 당당히 맞서 군 생활을 하겠다고 자처한 우리 해병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처럼 그 자부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해병대 입대가 고민되시나요? 주저하지 마시고 도전하세요! 진정한 해병은 여러분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한 번 뿐인 청춘, 해병대에서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고 스스로를 시험해보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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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오비의 군모닝] 139화 군대의 체육대회가 시작되었다!!

[군부대 주변 지역 관광지]이제 곧 휴가인데… 경남에서 가볼 만한 곳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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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휴가인데… 경남에서 가볼 만한 곳은 어디일까?

경남지역의 6월 축제를 소개합니다!



본격적인 여름을 알리는 6월. 낮에는 제법 기온이 올라 무덥지만 아침 저녁으로는 선선해서 여행을 떠나기에 좋은 계절입니다. 국가를 위해 젊음을 바쳐 군 복무를 하고 있는 국군 장병들도 휴가철을 맞아 연인 및 가족들과 함께 경치가 좋거나 볼거리가 많은 곳으로 나들이를 하고 있는데요. 동고동락에서도 휴가를 앞둔 군 장병을 위해 경상남도에서 펼쳐지는 6월 축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님과 함께 즐기는 새빨간 ‘양귀비꽃’의 향연


경남 하동에서 군 생활을 하고 있는 A 상병! 휴가를 나와 여자친구를 만났는데, 하동의 유명 관광지는 이미 다 가본 상황입니다. 매번 특별한 데이트를 원하는 여자친구, A 상병의 선택은 바로 꽃양귀비 축제입니다. 

코스모스와 메밀꽃 축제로 유명한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직전마을 일원에는 해마다 6월이면 5만㎡의 들판을 빨갛게 물들이는 꽃양귀비가 장관을 연출합니다. 지난 5월 27일부터 오는 6월 7일까지 열리는 ‘북천 꽃양귀비 축제’에서는 나들이객들이 여름 정취를 한껏 만끽할 수 있다고 합니다. 


꽃양귀비는 한동안 전국에서 재배됐으나 파종부터 개화까지의 과정이 까다로워 축제와 연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북천면과 북천 코스모스·메밀꽃 영농조합법인은 꽃양귀비의 아름다움을 알리고자 힘을 모았고, 그 결과 올해 처음 성공적으로 축제를 열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알프스 하동 북천 꽃양귀비 마을 축제’로 이름 붙여진 이번 축제에는 꽃물들이기, 향토전 부치기, 꽃양귀비 꽃잎 따기 등과 같은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관광객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축제장에는 수레 국화, 안개꽃, 금영화, 향기 달맞이꽃 등 각종 여름 꽃이 화려하게 수를 놓고 있습니다. 하동에서 생산된 우수 농특산물을 구입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관광객들의 다양한 기호를 충족시킬 예정입니다. 하동군은 앞으로도 ‘꽃양귀비 축제’를 더욱 발전시켜 전국적인 축제로 키워나가겠다고 하니 그 열기를 맛보고자 한 번 방문해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A 상병은 이곳에서 여자친구와 함께 각종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고 하는데요. 새빨간 양귀비꽃 사이에서 두 사람의 뺨도 붉게 물들었다는 후문이 전해집니다. 



<제1회 하동 북천 꽃양귀비 마을 축제>

문의 : 055-880-6331~5



휴식도 취하고 애국심도 높일 수 있는 그 곳! 


집이 서울인 B 일병은 오는 6월 12일, 동기들과 외박을 나가게 됩니다. 동기들도 모두 수도권 출신이라 어딜 갈지 막막했던 찰나, 옥포대첩기념제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작년에는 세월호 사건을 추모하고자 축제가 열리지 않았는데요. 그래서인지 B 일병과 동기들은 이번 축제에 대한 기대가 크다고 합니다!


6월 12일과 13일, 16일에 거제시 옥포동 옥포대첩기념공원 일대에서 제53회 옥포대첩기념제전이 개막됩니다. 축제는 1592년 5월 7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현재 대우조선해양이 자리잡은 옥포 앞바다에서 왜선 26척을 격침해 임진왜란의 첫 승전을 따낸 것을 기념하는 행사입니다. 옥포해전을 계기로 전열을 재정비한 조선군은 왜적으로부터 민족을 구하는 힘을 응집시킬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거제시가 주최하고 옥포대첩기념제전위원회가 주관하는 이 행사는 12~13일에 백일장과 사생대회, 해군 군악 의장대 시범, 승전행차가장행렬, 문화·민속행사 등이 펼쳐지고, 16일에는 제례봉행이 거행돼 이순신 장군의 애국혼을 기린다고 합니다. 


거제시 관계자는 지난해에는 세월호 사건으로 제례봉행만을 진행했지만 올해에는 예년처럼 면·동별 전통 민속놀이 대회 및 시민과 학생 1,000여 명이 참여하는 승전 행차 가장 행렬 등을 풍성하게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승전을 기념하는 자리인만큼 우리 국군 장병들이 빠질 순 없겠죠? 군인정신 가득한 그 현장으로 함께 떠나보시죠!



<제53회 옥포대첩기념제전>

홈페이지 : http://tour.geoje.go.kr

문의 : 055-639-4883



한산도에서 보내는 낭만적인 여름 정취!


멀고 먼 통영까지 와서 군 생활을 하고 있는 아들이 안쓰러웠던 C 이병의 어머니는 온 가족을 데리고 그의 첫 휴가를 함께 즐기기 위해 한산도로 떠났습니다. 여러 관광지를 구경했지만 아직 뭔가 부족한 기분이 들었는데요. 저녁이 되자 어디선가 신나는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바로 한산도 바다체험축제의 전야제인 노래자랑이 진행되고 있는 소리였습니다. 이튿날, 행사장으로 총출동한 C 이병의 가족들은 모두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가족, 연인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제9회 한산도 바다체험축제’를 추천합니다. 오는 6월 13일부터 14일까지 펼쳐지는 이번 축제는 한산면 추봉리 봉암마을에서 펼쳐지는데요.


축제 전야제 행사로는 마을별 노래자랑, 초청가수 공연, 장기자랑 등이 펼쳐지며 개막식에서는 식전행사 및 축하공연이 이어집니다. 맨손고기잡기, 바다보물찾기, 바지락 캐기, 해양레포츠(오션카약·수상자전거), 대나무낚시 등 다양한 체험행사도 많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또한 요술풍선, 자전거 하이킹, 이순신 장군 승전고 울리기, 한산사 힐링 산책, 요트체험 등의 부대행사도 마련되어 있으니, 데이트 코스로도 손색없겠죠?




<제9회 한산도 바다체험축제>

홈페이지 : http://tour.tongyeong.go.kr

문의 : 055-650-4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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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노력 ( 소개시켜드립니까 )

세계의 국방장관들이 모였다! 아시아안보회의(Asia Security Summ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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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국방장관들이 모였다!

아시아안보회의(Asia Security Summit)





아시아안보회의(일명 샹그릴라 대화)는 2002년부터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의 주관하에 매년 열리는 국제 행사입니다. 아·태지역에 국방 및 군사 분야의 최고위급 협의체를 설립하고자 하는 IISS와 지역 다자안보 협력을 주도하려는 싱가포르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시작되었고 이에 우리나라도 매년 이 회의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 윤광웅 前 장관이 참여한 5차 회의



*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 : International Institute for Strategic Studies) 

1958년 영국 런던에 설립된 민간 연구소로 워싱턴과 싱가포르에 지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보조를 받지 않는 비영리 연구소로, 재단 및 회원기금으로 운영됩니다. 3,000여 명의 직원과 500여 개의 국제 기업 및 연구소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안보회의는 창립 이래 매년 싱가포르의 샹그릴라 호텔에서 개최됩니다. 그래서 일명 ‘샹그릴라 대화’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 김장수  장관이 참여한 6차 회의


‘샹그릴라(Shangri-La)’라는 말은 영국의 소설가 제임스 힐튼이 쓴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 (Lost Horizon, 1933)’에 등장하는 가상의 지명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히말라야 산맥을 넘다가 우연히 ‘샹그릴라’라는 지상낙원을 발견, 그곳에서 영원히 늙지 않고 젊음을 유지하게 됩니다. 이후샹그릴라는 이상향의 대명사로 불리며 이 회의의 명칭으로까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아시아안보회의에서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영국, 아세안 국가 등 아·태 및 유럽 지역 27개국 국방장관, 합참의장, 안보 전문가 등이 참석해 의견을 교환합니다. 그야말로 아·태지역 최고 권위의 다자간 안보 협의체라고 할 수 있답니다. 



▲ 이상희  장관이 참여한 7차, 8차 회의


행사가 개최되면 회의는 세 가지 형태로 진행됩니다. 

먼저 공개회의로 진행되는본회의입니다. 이 회의는 국방장관급 회담으로 각국 대표들에게 자국의 정부정책을 설명하고 공감대를 확산하는 자리입니다. 국방 관련 최고위급 대표간 공개 논의를 통해 상호 신뢰와 각국 군사정책의 투명성을 증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특별회의는 정부 고위 관리, 민간 안보 전문가가 주제 발표와 질의/답변 및 토론을 하는 자리입니다. 회의는 비공개로 진행해 진솔하고 깊이 있는 논의를 유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양자대담입니다. 이 회담은 다수의 국방장관 또는 안보 관련 고위 인사들이 회동하는 우호증진의 자리이자, 상호 관심사를 폭넓게 논의하는 고위 군사외교 채널이 됩니다.


▲ 김태영  장관이 참여한 9차 회의


국방부는 2002년부터 지금까지 아시아안보회의에 줄곧 참여하며 국방정책과 안보 현안에 대한 의견 교환은 물론, 다자안보 협력을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 김관진 全 장관이 참여한 10~13차 회의



한민구 국방장관 역시 5월 29일부터 31일까지 열리는 올해 제14차 회의에 참석할 예정입니다. 

한민구 국방장관은 회의 기간 중 한·미·일 국방장관 회담을 비롯하여 한·미 국방장관 회담과 한·일 국방장관회담을 개최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이와 함께 주요 참가국과의 개별 장관급 회담을 통해 국방 현안 및 상호 관심사를 논의할 예정입니다.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서는 최근 북한의 도발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억제하기 위한 한·미 연합 방위태세를 강화하는 방안을 중점적으로 협의할 계획입니다. 

또한 일본이 참여한‘한·미·일 국방장관 회담’에서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공조 방안과 인도적 지원, 재난구호 등 초국가적·비군사적 위협 등에 대한 협력 방안을 논의할 예정입니다. 

‘한·일 국방장관 회담’에서는 新미·일방위협력지침 관련 사항, 북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공조 방안, 양국 국방교류 협력 증진 문제 등 양국 공동 관심사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며, 구체적인 의제는 현재 양국 국방당국이 조율 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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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 미대사관 폭파범의 허망한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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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 미대사관 폭파범의 허망한 최후


역사는 빈 라덴의 죽음이 보여주듯 테러범의 말로는 역시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을 파리처럼 죽이는 IS들의 말로(末路)도 종국에는 멸망뿐일 것이다. 용의주도하게 준비하여 테러에 성공한 테러리스트도 죽을 때는 마치 저승사자에게 제 발로 걸어가듯이 허망하게 죽을 수도 있다는 사례가 하나 있다.


2011년 6월 8일 수요일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 북서쪽 교외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이는 알 카에다 동 아프리카 총책 파줄 아부둘라 모하메드와 그의 부관, 또는 운전사로 보이는 알리 데레라라는 동행자의 시신이다.


왼쪽이 파줄이고 오른쪽이 알리 데레라는 조직원이다.


파줄은 1998년 케냐 미 대사관 폭파의 배후 주모자로 미국 정부는 그에게는 500만 불의 현상금을 걸었었다.


그는 그 전날 밤 도요다 트럭을 타고 모가디슈 검문소에 나타났다. 파줄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군벌 지역으로 가려다가 길을 잘못 들어 소말리아 정부 경찰의 검문소에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검문을 받다가 AK 47을 소지한 사실이 발각되자 사격을 하며 도주하다가 총격을 받고 죽었다. 치안이 불안한 소말리아에서 경찰이 거동 수상자와 총격전을 벌이는 사건은 예사였기 때문에 그와 그의 동행자들은 별다른 조사없이 관행대로 매장되었다.


그러나 매장 후 그의 소지품을 검사한 소말리아 당국은 그가 예사 인물이 아님을 감지했다. 그는 남아공화국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다. 40,000 달라의 돈도 가지고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보통 신분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서 보여준다. 가족 사진도 있었지만 빈 라덴의 죽음을 애도하는 편지도 나왔고 모가디쉬 주변의 군벌들의 작전도도 나왔다.



1998년 대량의 폭탄을 적재한 트럭 폭발로 날아간 

케냐 나이로비 미국 대사관


정밀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소말리아 당국은 시신을 다시 발굴해서 수배된 파줄의 사진과 대조해보고 그가 파즐임을 확신하고 미국으로 조사 샘플을 보내 그의 유전자를 대조 확인하게 했다. 


미국에서 이미 확보하고 있었던 그의 유전자와 대조 결과, 그가 13년간이나 도피 생활을 하던 파즐이 확실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파줄은 아프리카 동해안 코모로 섬 출신으로서 케냐 범행 후 아랍, 아프리카, 인도 인종 등이 혼혈된 코모로인 혈통과 비슷한 생김새의 주민들이 거주하는 소말리아 해안 지방을 전전하며 추적을 피해왔었다.


파줄 아부둘라 모하메드


파줄의 케냐 나이로비 대사관 폭파 테러로 224명이 죽었는데 대부분 케냐인들이었고 12명만이 미국인이었다. 이 대사관 폭파 생존자 중 한 명인 더그라스 시디아로는 폭발로 두 눈을 잃고 시각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파줄 아부둘라 모하메드는 빈 라덴이 갔던 운명과 같은 운명의 길을 갔군요."

"칼, 총탄, 그리고 폭탄등으로 남을 죽이는 짓을 일삼는 자는 꼭 같은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는 운명을 갔다는 말입니다."


테러 피해자인 그도 필자가 앞에서 인용한 역사적 진리를 알고 있었다고 하겠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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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다! 든든하다! 전투식량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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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다! 든든하다! 전투식량의 모든 것!



얼마 전 MBC ‘일밤-진짜사나이 2’에서 고된 훈련 후 전투식량을 맛있게 먹는 장병들의 모습이 화면에 나왔습니다. 특히 방송인 김영철은 ‘그 동안 먹어본 것 중 제일 맛있는 것 같다’며 전투식량의 맛에 감탄하기도 했는데요! 고된 훈련 뒤에 먹는 전투식량은 보기만 해도 꿀맛일 것 같죠? 맛은 물론 떨어진 사기를 충전하는데 제격인, 군인들을 위해 개발된 특별한 먹거리, ‘전투식량’에 대한 모든 것을 지금부터 소개할게요!



먹어야 산다! 생존을 위한 비상식 ‘전투식량’

전투식량은 전투 때 간편하게 지니고 다니거나 먹을 수 있도록 만든 비상식량을 말합니다. 줄여서는 ‘전식’이라고도 해요. 보관과 조리가 편리하면서 맛이 좋고, 먹기 쉽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고칼로리, 고열량을 자랑하는 전투식량은 전투 중에도 찾아오는 허기를 없애는 데 그만입니다. 전투나 훈련 중 제공되는 식사는 장병들의 생존력과 심리적 안정감, 활동성 유지에도 큰 역할을 합니다. 


미국에서는 무슬림과 채식주의자용 전투식량도 공급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는 미식의 나라답게 술과 과일음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유통기한은 2~3년 정도로 일반 식품보다 긴 편이며, 칼로리는 약 1,100kcal입니다. 요즘에는 간편함과 휴대성 때문에 전투식량이 낚시객이나 등산객 등 일반 대중들도 구입하는 추세입니다.



전쟁의 역사만큼 깊은 전투식량의 역사

전투식량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만큼이나 깊습니다. 최초의 전투식량은 프랑스 나폴레옹 전쟁 시대에 탄생한 통조림이란 것 아시는 분들도 계시죠? 


1880년대 초 러시아로의 장거리 원정을 앞둔 나폴레옹은 군수보급의 부담을 줄이고자 휴대가 간편한 식량 개발 기술 공모전을 펼쳤습니다. 당시 1만 2000프랑이라는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고, 니콜라 아페르가 응모한 휴대용 식량을 선정하게 됩니다. 


최초의 형태는 음식을 와인병에 담아 가열하면서 밀봉해 멸균 진공처리하는 병조림 방식이었습니다. 이후 영국의 피터 듀란은 병조림의 단점을 보완해 양철 캔 안에 음식을 넣는 통조림을 발명했지만, 안타깝게도 큰 인기를 얻지 못 했습니다. 그 이유는 칼로 통조림을 뜯다가 칼에 다치고, 칼날이 상하기도 했으며, 총으로 캔을 쏴버려 내용물이 쏟아지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통조림은 1858년에 캔 오프너가 등장하면서 급격히 인기를 끌며 보급되게 됩니다.


19세기에는 전투식량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미군은 간단하게 배급하고 보관이 쉬운 음식에 대한 연구에 열중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C 레이션’이라는 전투식량 패키지를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패키지의 내용은 통조림 하나에 조리된 육류와 채소가 섞인 주식을, 다른 통조림에는 건빵과 인스턴트 커피 등을 넣은 것이었습니다. 그 외 액세서리 팩에는 숟가락, 휴지, 깡통 따개, 성냥, 담배 등의 기호식품을 넣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전투식량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베트남 전쟁 때부터입니다. 한국전쟁 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식량은 다름 아닌 주먹밥이었습니다. 베트남전 당시 C 레이션이 우리 장병들에게도 지급되었으나 병사들 대부분이 느끼한 음식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군도 한국식 전투식량 개발에 나섰고, 1967년에는 밥과 김치, 두부, 꽁치 등을 내용물로 구성한 K 레이션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또 1996년에는 강릉 무장공비대간첩 작전을 계기로 물과 불 없이도 급식이 가능한 발열팩 전투식량이 등장했습니다.



전투식량 나라별로 어떻게 다를까?



나폴레옹의 명언 중 ‘병사는 잘 먹어야 잘 싸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급박한 전투 현장에서의 급식은 군대의 사기를 좌지우지할 정도라고 하는데요. 세계 각국이 전투식량 개발에 남다른 공을 들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라별로 전투식량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탈리아전투식량에는 40도짜리 술 코디얼 샷, 카푸치노 가루, 비스코티, 캔에 담긴 칠면조, 파스타 수프, 라이스 샐러드가 들어 있습니다. 디저트로는 파워 스포츠 바, 과일 샐러드 캔, 뮤즐리, 초콜릿 바 등이 있으며 그 외 음식을 데울 수 있는 일회용 캠핑 스토브도 지급됩니다.


프랑스는 간소하지만 독특한 요리를 자랑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대표적으로 사슴고기 파이, 고기와 콩을 넣어 뭉근히 끓인 요리인 카술레, 크레올식 돼지고기, 크림 초콜릿 푸딩이 있습니다. 또 일회용 히터, 커피, 드링크 파우더, 아침식사용 뮤즐리와 캐러멜도 함께 제공됩니다.


독일전투식량은 자몽 팩과 물에 타먹는 주스 가루, 이탈리아식 비스코티에 간으로 만든 소시지 스프레드, 호밀 흑빵, 감자가 곁들여진 헝가리식 스튜, 체리와 살구맛 잼으로 구성되어 있고, 캐나다는 투스칸 소스를 얹은 연어와 야채 쿠스쿠스 중 하나를 메인 요리로 선택할 수 있으며, 그외에 피넛버터와 라즈베리 잼 샌드위치 등이 공급됩니다.



맛도 종류도 다양하다! 대한민국 전투식량 먹는 법은?

대한민국 전투식량은 취식 형태로 볼 때 크게 뜨거운 물에 데워 먹는 I형, 물을 부어먹는 II형, 특전부대원들을 위한특전형, 발열체로 데워먹는 즉각 취식형의 4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발열 형태는 햄 볶음밥과 물을 넣어서 먹을 수 있는 김치비빔밥, 더운물에 데워먹을 수 있는 쇠고기비빔밥, 햄 볶음밥 등이 대표적이며, 아몬드 케이크, 볶음김치, 초코볼 등이 더해집니다. 보통 1회 제공량 칼로리는 1,192kcal 정도로 성인 한 끼 권장 칼로리가 700~800kcal인 점을 감안하면 야전 활동하기에 충분한 열량이 됩니다.



        전투식량 Ⅰ형                          전투식량 ⅠⅡ형



그렇다면 먹는 법은 어떨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먼저 포장지를 뜯어 지퍼를 열고, 안에 있는 내용물을 모두 꺼낸 뒤 발열 끈을 잡아당기기만 하면 됩니다. 이어서 15분가량 기다리면 맛있는 전투식량이 완성됩니다.

참고로 우리나라 장병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즉각 취식형 전투식량이라고 합니다. 발열체를 이용해 식사를 쉽게 데울 수 있고 맛도 상대적으로 좋기 때문입니다. 그 외 퍽퍽한 파운드케이크는 우유나 초코볼을 녹여 함께 먹으면 더욱 맛있다고 합니다.



이렇듯 과거 야전에서 최소한의 생존 수단으로 활용됐던 전투식량은 나날이 발전해 이제는 맛과 영양은 물론 휴대가 간편하다는 장점으로 야외 활동이나 백패킹을 할 때, 낚시할 때 등 언제 어디서든 유용하게 맛볼 수 있는 별식이 되었습니다. 실제로도 시중에서는 더욱 다양한 메뉴의 전투식량을 선보이고 있다고 하니 호기심 있으신 장병들은 휴가 때 한 번쯤 먹어보아도 좋을 듯합니다. 이상 전투식량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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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켓 엔진을 통해 본 냉전시대 [ 4 ] 단순한 그러나 어려운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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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켓 엔진을 통해 본 냉전시대 [ 4 ] 단순한 그러나 어려운 시도



미국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엔진의 성능 향상, 다단계 로켓, 부스터를 이용한 추력증대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병행하면서 로켓의 성능을 증대시키기로 하였는데, 사실 이러한 방법들은 소련도 진행하고 있었을 만큼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여러가지 시도와 실험 결과, 최종적인 방안으로 엔진의 성능 자체를 증대시키는 것이 로켓의 힘을 늘리는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게 되었다.



[ 실험 중인 로켓 엔진의 모습, 의외로 단순해 보인다 ]


그런데 처음에 설명한 것처럼 로켓의 엔진은 단순히 크기만 키운다고 추력을 쉽게 늘릴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다. 폭발력을 증대시키면서 한편으로 발생하는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튼튼한 금속 재료, 연비를 높이기 위한 최적의 연료 혼합 장치 및 연료 공급 계통의 재설계, 로켓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냉각 장치의 개선 등 여러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여야 엔진의 능력을 배가 시킬 수 있었다.



[ V2도 초창기 엔진 문제로 많은 실패를 겪었다 ]


초창기 소련 우주 개발을 선도하였던 코롤레프(Sergei P. Korolev)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고심을 하였다. 코롤레프가 이끈 소련의 기술진은 1955년, 기존의 엔진보다 그 성능이 향상된 노즐을 가진 RD-105 엔진을 개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RD-105 엔진만으로 대륙 간을 횡단하여 미국을 강타 할 수 있는 사거리 8,000km 이상의 로켓을 만들기에는 모자랐다.



[ 소련 우주개발의 선구자 코롤레프 ]


그렇다고 이제 막 실용화에 성공한 RD-105 엔진보다 몇 배 이상 뛰어난 고성능의 엔진을 단기간 내 개발하기는 무리였다. 당시 기술력으로는 여러 난제를 동시에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엔진의 성능을 배가시키는 노력은 답보만 거듭하게 되었다. 반면 조급하였던 소련의 군부는 하루빨리 미국을 압도할 수 있는 장거리 로켓의 개발을 요구하였다.



[ 초창기 소련 장거리 로켓의 베이스가 되는 RD-105 엔진 ]

 

고심을 거듭하던 코롤레프는 한 가지 방안을 생각하였다. 의외로 단순한 방법이기는 한데 RD-105 엔진을 여러 개 모아서 동시에 추력을 얻게 하면 충분한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일종의 부스터이기는 한데, 미국의 경우는 보조 추력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1~4개의 보조 로켓을 로켓 동체에 붙이는 방법이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코롤레프의 생각은 보통의 부스터 개념과는 차이가 있었다.



[ 추력을 증가시키기 위해 쌍으로 연결된 미국 아틀라스 로켓의 RD180 엔진 ]


코롤레프의 생각은 다수의 엔진을 묶음으로 하여 병렬로 연결하는 형태였다. 즉 용량이 한정된 전기만 사용하여야 한다고 가정할 때, 요구되는 밝기를 낼 수 있는 대용량의 전구가 없으면 작은 전구 여러 개를 동시에 켜서 같은 밝기를 낸다는 원리였다. 우선 코롤레프는 4개의 RD-105 엔진을 하나의 모듈로 하고 여기에 작은 보조 엔진을 더 붙인 RD-107 엔진을 만들어 추력을 증가시키는데 성공하였다.



[ RD-105를 모듈로 하여 제작된 RD-107엔진 ] 


ICBM의 최소 요건이라 할 수 있는 사거리 8,000km 이상의 로켓에는 당연히 상당량의 연료가 탑재되어야 하고 그만큼 무게가 늘어나게 된다. 이런 거대한 로켓을 발사하려면 추력이 적어도 3.5MN 정도는 되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적어도 5~6개의 RD-107 엔진이 필요하다고 계산되었다. 즉, 하나의 로켓에 20개정도의 RD-105 엔진들을 병렬로 연결하면 충분한 추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이었다.



[ 최근의 로켓도 종종 폭발사고를 일으킬 만큼 위험한 물건이다 ] 


이때 핵심은 동시에 엔진이 점화가 되고 각 노즐마다 동일한 추력이 지속적으로 발생되도록 연료를 공급하는 제어 기술이었다. 작은 추력의 엔진을 다발로 묶어 대 추력을 내는 것은 이론적으로 가능하지만 각 엔진이 동시에 점화되지 않거나 또는 추력이 엔진마다 차이가 난다면 비행의 안정성이 당연히 저하되고 심한경우는 로켓이 폭발할 가능성도 컸기 때문이었다. ( 계속 )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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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감 넘치는 으~리의 사나이들이 뭉쳤다! 그들의 애국심을 다시 일깨우는 의병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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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감 넘치는 으~리의 사나이들이 뭉쳤다!

그들의 애국심을 다시 일깨우는 의병의 날


▲1907년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무장한 의병

(사진출처=위키백과)


축제와 연휴가 많았던 ‘가정의 달’ 5월이 지나고,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6월 1일이 ‘의병의 날’이라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의병의 날은 국가의 위기 시 스스로 무기를 들고 일어난 의로운 민간병사들, 즉 의병의 애국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뜻에서 2010년 5월 제정된 국가기념일입니다. 오늘은 나라를 위해서 뜻을 모았던 의병의 활약상과 의병의 날 행사에 대해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역사 속 의병의 활약상

의병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국난 극복을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민병을 말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국가에서 희생을 무릅쓰고 군사들을 동원하지만, 민간인의 경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 속에서 내 나라, 우리 백성들에게 닥쳐오는 위험을 앞에 두고 목숨을 초개같이 내던지고 구국의 의지를 불태웠던 의병들이 많습니다. 이분들의 거룩한 희생 덕분에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아, 많은 의병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임진왜란 때와 1895년 을미사변 이후 1907년까지가 의병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입니다. 역사 속에서 눈부시게 활약한 의병들의 모습을 소개하겠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거름강 전투

(사진출처=의령군청)



# 농민·승려 등 임진왜란 당시 전국적으로 활약한 의병

임진왜란은 1592년,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과의 전쟁입니다. 일본은 막강한 군사력과 신무기인 조총을 앞세워 우리나라 각 지역을 쉽게 점령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장의 상황이 일본에 유리해지면서, 전직 관료와 사림, 승려들은 농민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킵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공동체 문화가 발달했기 때문에 나라를 빼앗길 수도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의병을 조직하는 것은 매우 수월했습니다. 또한 의병들은 향토 지리에 익숙하고 그 조건에 알맞은 무기와 전술을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병들은 왜군의 대규모 군대에 맞서 정면으로 충돌하기보다는 매복하거나 기습공격을 하는 게릴라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의병의 활동으로 왜군은 전략상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의병은 직접 전투해 참여해 승리하기도 했지만,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들의 사기를 높여 국난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는 것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 한말 국권회복에 앞장섰던 의병부대 

(사진출처=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 조선인의 기개를 보여준 구한말 의병운동

임진왜란 이외에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열하게 외적과 맞서 싸운 의병은 1895년 을미의병과 1905년 을사, 정미의병으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을미의병은 일제의 단발령 및 명성황후 시해에 분개한 지방 유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항일의병운동입니다. 여기에 일반 농민과 동학 농민군의 세력이 가담하기도 했지요. 이들은 전국 각 지역을 무대로 군사 활동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충주를 비롯한 지방 주요 도시를 공격하는 한편, 친일 관리와 일본인들을 처단했습니다. 을미의병은 아관파천으로 친일정권이 무너지고, 그 불씨였던 단발령이 철회되자 수그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병항쟁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자극만 유발되면 언제라도 의병활동을 재기할 수 있는 활화산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본격적으로 집어삼키려는 의도로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합니다. 한국인의 반일감정은 극도에 달했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다시 불길처럼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을사의병입니다. 을미의병이 해산된 뒤 은거 중이던 의병장들은 병력을 다시 규합하여 전국적으로 대일항전을 재개했습니다. 을미의병 당시 참여하지 못한 유생과 지사들이 을사의병에 대거 가담했습니다. 이와 같이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된 을사의병은 정미의병으로 이어졌습니다.


▲ 한말 의병전쟁을 주도한 의병장들(좌부터 민종식, 최익현, 임병찬)

(사진출처=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일본은 1907년, 헤이그 특사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키며 정미7조약을 체결하는 등 한국의 식민지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습니다. 또한 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며 무력 저항 세력을 제거하고 나섭니다. 이에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여 보다 확대 발전된 의병부대가 만들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정미의병입니다. 해산된 군인들의 참여로 정미의병의 무기와 세력은 크게 강화되었습니다. 

전국적으로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여러 조직들이 연합하며 활동했습니다. 정미의병에는 상인•공인•노동자•농민 등 전 계층이 항일전에 동참함으로써 항일전쟁의 성격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큽니다.1910년 경술국치 때까지 이어오던 의병활동은 일본의 방해를 피해 점차 남북 만주•연해주 지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항전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갔습니다. 결국 의병들은 1920년대 장렬한 항일전을 전개한 독립군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한국 최고의 의병 축제, 의병제전

의병의 날 행사인 ‘의병제전’은 망우당 곽재우 장군을 비롯한 휘하 17장령과 의병들을 기리기 위한 축제입니다. 경남 의령군에서 열리는 이 축제는 종전에는 의병의 날에 맞춰 행사를 진행했지만, 농번기를 피해 최근에는 의병 창의일인 4월 22일에 열리고 있습니다. 행사 내용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혼불 채화식, 점화식, 진혼굿, 추모제 등으로 이뤄지며 그 외에도 불꽃축제나 소망등 점등을 통해 의병의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전국민속소싸움대회나, 의병 큰판장기대회 등이 개최되어 축제 관람객들의 참여를 높이며 의병제전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올해 축제는 끝났지만, 의병의 뜻을 기리고 싶은 분이라면 내년 축제에는 꼭 참여해 보시길 바랍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희생과 애국정신이 더욱 숭고하게 느껴집니다. 의병의 날은 그분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그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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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커드 미사일의 실전기-북한의 유도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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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커드 미사일의 실전기-북한의 유도탄 -1-


1812년, 나폴레옹 침공 때 러시아군은 프랑스군 포병들의 막강한 화력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나폴레옹은 원래 포병 출신이었던지라 강력한 포병 부대를 육성했고 실전에서 이 포병 화력을 집중 운용하여 적을 분쇄하는 전략을 자주 구사했다.

 

러시아도 포병이 강한 나라였으나 나폴레옹의 포병에 당한 뒤에 포병을 더욱 강화한 군사 교리와 부대 편제를 채택하였다. 러시아는 로켓 무기가 기술적으로 계속 발전하자 포병 중시의 전통을 이어받아 로켓을 주력 포병 화기로 채택했다. 2차 세계 대전시 독일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던 카츄사 다연장 로켓의 활약이 그 성공적인 실전 사례의 하나일 것이다. 

 

그 로켓 중시의 소련 포병 전통은 지대지[地對地]미사일로 이어졌다. 북한도 현대전 교리를 전수해준 소련의 영향으로 로켓 무기와 유도탄을 주력무기시 해왔다. 북한군은 방사포라는 대구경 로켓으로부터 로동 미사일등 여러 로켓이나 유도탄 전문 부대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중 한 부대는 연평도 포격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현재도 제공권 확보가 쉽지 않은 북한은 중단거리 유도탄이나 로켓 무기를 전략적으로 중시하고 집중 배치하고 있다. 그 수량이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어 수 천기가 될 수도 있다는 관측통의 전망도 있다.



소련제 스커드  미사일


북한 유도 무기 중심에 스커드 미사일이 존재하고 있다. 이 북한 무기가 우리의 인지(認知) 세계에 들어와 있는지는 수십 년이 된다. 그러나 그 위력적 감지(感知)는 그렇게 크지 않다. 초기 스커드 미사일의 명중률이 별로였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한 오래된 평가절하는 북한 스커드 미사일에 대한 우리 경계 감각을 무디게 한 점이 없지 않다.

 

더구나 걸프 전에서 둔하게 날아오는 스커드 미사일들을 빠짐없이 요격해버렸던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활약이TV에 여러 번 방영된 것이 이런 평가 절하의 인식에 한 몫을 했다.

 * 이 전과가 대부분 과장되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지만 대강 70% 성공률을 보임


걸프 전에서 요격당한 스커드 미사일


그러나 현대 전쟁사는 녹녹치 않은 스커드의 자취를 보이고 있다. 북한의 대표적인 스커드 미사일들이 다량 사용 되었던 중동의 여러 전사들을 간단히 살펴보면 우리가 진지하게 검토해보아야 할 국방 전훈(戰勳)들을 얻을 수가 있다.

 

그간 스커드 미사일들이 2차 대전 중에 런던에 발사된 지대지 미사일 V-2 다음으로 다량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직시하자. 아프가니스탄의 내전 중에만 2,000발 가까운 믿지 못할 다수의 스커드 미사일들이 발사되었었다. 최악의 경우, 좁은 한반도에 거주하는 5,000만 국민들 밀집 주거지에 저 정도 수량의 미사일들이 예고도 없이 날아올 가능성을 최다 스커드 미사일 사용 지역인 아프간 내전이 보여준다고도 할 수가 있다.

 

중동 각국은 명중률 낮은 스커드 미사일을 주로 면(面)표적에 다량 발사하여 그 명중률을 높이는 방식으로 운용했다. 그래서 대개 도시나 큰 지역 표적등을 목표로 다수 발사되었고 이는 일종의 무차별 사격이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중동과는 비교도 안 되게 공업화와 산업화가 발달된 우리나라는 사실 고양이 앞에 먹음직스런 생선이 가득한 생선 가게를 내어 놓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하겠다.


거의 도시화된 남한의 수도권에 별다른 유도장치 없는 방사포같은 것을 발사해도 대부분 인명 피해의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다. 과거 해온 짓들로 보아서 북한은 무고한 민간인의 인명 피해 정도는 관심도 없을 듯하다.

 

그간 꾸준한 개량을 거듭해서 그 명중률이 상당히 향상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스커드 미사일의 위협을 느껴야 한다. 초기형 스커드 미사일의 명중률은 그 오차 범위가 500m나 되는 불량한 것이었다.

 

현재는 GPS나 스마트 조준 기술 발달로 오차 범위가 단지 50m 내외인 스커드 D 형 미사일의 북한제인 로동 1호까지 선을 보였다.이것은 면(面)표적이 아니라 점(點)표적에 대한 사격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중동의 전사들도 스커드 미사일들이 밀집 병력이나 시설물등의 작은 점(㸃)표적에 발사되어 명중시켰다는 심심치 않은 사례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사는 남한에는 북 스커드 미사일이 조준 사격할만한 점표적들이 넘쳐 흐른다. 국토 전역에 산재해있는 원자력 발전소나 포항제철 같은 대형 플랜트, 그리고 항만이나 공항 등의 큰 시설물들은 유사시 북한이 스커드 미사일로 조준 사격을 할 취약한 목표물들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스커드 미사일의  탄생

스커드 미사일의 최초 원형은 사실 나치 독일이 영국을 폭격하던 V-2 로켓의 복제품이었던 소련제 초기 로켓 R-1을 더욱 개량해서 1957년 선보인 제품이다.

 


V-2 로켓


스커드[Scud-질주한다는 뜻]는 나토 정보 부서에서 붙여준 코드 네임이고 소련 -러시아에서는 스커드 시리즈의 개발형마다 각각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첫 개발품이 R-11,다음 모델은 R-17,그리고 후기형은 R-300 엘부르즈라는 명칭을 가졌다.그 표준적인 길이는 11.25m에 직경은 0.88미터다 비행 속도는 마하 5이상이었다. 사거리는 초기형의 경우 150km였지만 후기형은 1,000km로 연장되었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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