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욤 키프르 전쟁 전후[前後] 그리고 전쟁동안 이 파이어 비는 많은 정찰 임무를 실시하였다. 무인기들은 이스라엘 중앙부의 요르단과 이라크 ,남부의 이집트, 북부의 레바논과 시리아를 정찰하였다.
미국 파이어 비 정찰형 - 이스라엘은 마바트라는 자국명을 부여하였다.
욤 키프르 전쟁이후 시리아가 격추시켰다고 주장하는 비행기들은 전부 이스라엘이 발진시킨 무인기들이었다. 무인기들은 특히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 공군기를 격추하던 이동형 미사일 SAM-6의 탐지에 크게 공헌했다.
기동성 좋은 SAM-6
이제는 조종사들이 실전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적 대공포 진지 상공으로 정찰 비행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조종사들은 상황에 늦은 정보를 받지 않아도 되었다. 이스라엘은 이제 실시간 전송이 가능한 국산 무인기 개발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간 이스라엘이 축적한 기술 수준이 무인기 개발의 가능성을 자신하게 만들었다. 이스라엘 공군에서 실전을 통해 필요한 무인기 개념의 윤곽이 잡혀가자 군은 이스라엘 주요 항공기 제조회사인 IAI와 Tadiran 양사에게 무인기의 개발을 발주했다. 두 회사는 각자의 고유 디자인인 스카우트와 메스티프를 국방부에 제출했다.
IAI 무인기 스카우트
이 무인기들은 무선조종 모형 비행기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튼튼한 기체와 강한 추력의 엔진, 무선 조종 기능 그리고 난기류에도 흔들리지 않고 정확히 촬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무인기들은 그 촬영 화상을 지상에 실시간으로 송신하는 기능이 있었다. 지상 조종사와 항법사는 F-16의 조종간과 비슷한 스틱을 이용해 무인기뿐만 아니라카메라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가 있었다.
지상 조종사는 광각의 렌즈로 정찰 지역의 전역을 볼 수도 있고 특정 지역을 확대해서 볼 수 있었다. 두 항공기 제조 회사에서 제출한 무인기들은 모두 여섯 시간동안 체공하며 100키로 제곱 미터의 면적을 정찰할 수 있었다. 무인기 조종은 비교적 단순했었고 그 생존성도 우수했다.
타디란 사의 무인기 메스티프 [마스티프]
그러나 지상 조종센터를 포함한 무인기 가격은 100만 달러가 넘어 만만치 않았다. 이스라엘 국방부는 생김새도 비슷한 두 제작사의 두 가지 무인기들을 모두 제식으로 받아들여 운용에 들어갔다. 1978년 참모총장 데이비드 이르비의 이스라엘 공군은 세계 최초로 무인기 운용만을 전문으로 하는 부대를 창설하였다. 이런 전문 부대는 무인기의 선도 주자 미국도 가지고 있지를 않았다. [미국의 무인기는 정보 부대에서 운용했다.]
하지만 아직도 이스라엘 군부 내에 무인기 부대를 장난감 가지고 노는 부대라는 빈정거림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82년 이스라엘의 국산 무인기 부대는 레바논 내전 때 개입한 시리아군의 대공 유도탄 부대를 남김없이 섬멸하는 전과 수확에 중심 역할을 하여 빈정대는 사람들을 무색하게 하였다.
미국 그러맨 사의 E-2C 호크 아이 조기 경보기와 무인기의 합동 운용은 전선에서 먼 후방의 적 움직임을 손금 보듯이 읽어내서 그 정보를 실시간으로 조종 센터를 통해 전투기들에게 알려주어 적을 민첩하게 포착 파괴할 수가 있었다. 무인기들은 정찰 외에 디코이[허위 표적]로 시리아의 레이더를 기만하기도 하였다.
내전(內戰)동안 레바논과 시리아 영토를 넘나드는 수많은 정찰 활동을 통해서 실전의 전과를 남김없이 발휘하자 다른 국가들이 이스라엘 무인기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냉전시대와 월남전에서 무인기를 사용하여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은 미국이 제일 먼저 이스라엘 무인기의 성능을 알아보았다. 1983년 레바논 내전에 개입한 미군은 레바논 전장에서 이스라엘 무인기의 대활약을 눈 여겨 보았다.
무인기를 먼저 주문한 것은 미해군이었다. 미 해군은 함포 사격에 절실한 실시간 정보 수집을 위해서 이스라엘 무인기를 필요로 했는데 이 무인기는 물론 정찰 임무도 할 수 있어야 했다. 1984년 이스라엘의 두 무인기 회사는 합작으로 미 해군에게 제안한 개발 계획은 수락되었다. 이주문을 수행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IAI 사내에 Mazlat - 나중에 Malat로 개명- 라는 개발 부서를 만들었다.
미국은 이스라엘 두 무인기중에 Tadiran사의 메스티프 형을 개발의 원형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미군은 항상 외국회사에서 무기를 구매하는 것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IAI의 Malat는 미국회사 AAI와 합작으로 개발 생산한 AAI RQ-2 Pioneer 파이오니어라는 무인기를 납품하였다.
걸프전에서 활약한 파이오니어
이라크의 한 소부대가 이 무인기에게 항복하기도 하였다.
파이오니어는 걸프전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이 파이오니어 기는 2007년에 더 나은 성능의 쉐도우와 교체되었다. 이스라엘의 무인기 개척자인 두 무인기는 1990년대까지 활약하다가 1992년에 선보인 서처 무인기와 임무 교대를 하였다.
새 무인기 써처는 사진으로 보면 전 모델인 스카우트나 메스티프나 비슷하게 생겼지만 실제로는 두 배나 컸고 성능도 훨씬 개량된 것이었다. 성능이 뛰어나 여러 나라로 판매가 되었다. 서처는 한국 군이 사용하는 무인기 송골매에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하였다.
서처
무선 조종 모형 비행기에서 시작한 이스라엘의 무인기 사업은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 이스라엘은 세계 최대의 무인기 수출국이다. 현재는 훨씬 더 발전한 쇼발 무인기[Heron -2007년 개발]를 기반으로 개발한 여러 파생형을 선보이고 있다.
무인기 쇼발
이 중에는 45시간을 비행할 수 있는 슈퍼 헤론 형도 있고 탐지 거리가 300km나 되는 레이더를 장비한 해공군형도 있다. 미국 리퍼 무인기처럼 미사일로 지상의 목표를 파괴할 수 있는 4세대 무인기 에이탄도 개발되어 실전에 투입되기도 하였다.
지상 공격이 가능한 슈퍼 헤론 - 벌써 실전에 투입하여 활약 하였다.
이스라엘의 세계 첨단 무인기들의 원조는 이스라엘 군 몇 명의 선각자적인 인물들이 날린 무선 조종 모형 비행기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스라엘 무인기 개발사는 한 명언을 여실히 증명해준다. ‘시작이 반’이라는 교훈이다. 세계적 수준에 있는 일본의 로켓 기술도 1955년도 도쿄대 이토카와 히데오 [糸川 英夫]교수가 발사한 길이 23cm의 연필 로켓으로부터 출발하여 오늘날 달에 로켓을 쏘아 올리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오늘날 일본 우주 산업의 큰 장을 열었던 길이 23cm의 펜슬 로켓
바로 이와 같은 개발의 시작 자세는 한국이 걸어가야 할 첨단 기술들 여러 부문에서 적용되어야 겠지만 특히 무인기 개발에는 접목되어야 할 개척자적 자세라고 하겠다. 이스라엘의 무인기 개발사를 소개하며 덧붙이는 사족의 말이지만 산 많고 계곡 많은 한국적 지형을 고려하면 지상 부대 작전에 무인기의 지원이야 말로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한 가지 사례를 통해 전하고자 한다.
한국 전쟁중에 미군은 북한군과 약 20여회의 전차전을 벌여 거의 승리했다. 그 승리한 전차전들을 자세히 분석해보니 한 사실이 발견되었다. 즉 승리의 현장 상공에는 항상 정찰기 L-19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적 탱크를 먼저 보고 먼저 사격을 가했으니 이는 승리로 귀결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다.
L-19, 후에 O-1
한국의 전차전은 육상 전투에서 상공의 정찰 시야 확보가 절대 필요하며 이를 충족시켜 주는 것은 무인기라는 해답이 나온다. 다시 말하자면 한반도는 무인기 활약의 최적 지형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상기해볼만한 것으로서 북한의 연평도 포격이 있었을 때 포격과 함께 즉각 출격시켜 포격의 결과를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무인기가 있었더라면 그 응징 포격은 더욱 좋은 결과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나라에서도 세계에 자랑할 무인기들이 생산되어 군에서도 무인기를 적극 도입하고 그 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육해공 여러 방향에서 무인기 활용의 전술 전략 교리 개발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끝)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