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켓 엔진을 통해 본 냉전시대 [ 7 ] 재미삼아 던진 돌에
코롤레프의 주장을 수용하여 시험 삼아 발사한 스푸트니크 1호는 소련에게는 ICBM 보유를 만천하에 과시한 하나의 방편이 되었지만, 이 소식을 접한 서방은 상상이상의 공포와 두려움에 빠졌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의 현실적인 위협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사실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였고 그보다 미국의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주었다는 심리적인 요인이 더 컸다.
[ 냉전시기 심리적인 주도권이 소련으로 넘어갔다 ]
제2차 대전 후 미국과 서방은 철의 장막을 치면서 냉전시대를 열은 공산권의 맹주 소련이 두 번째 핵무기 보유국임에도 여전히 영토나 커다란 후진 농업국으로나 폄훼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이 과학 기술 분야에서도 가장 첨단이라 할 수 있는 우주 개발과 미사일 분야를 서방보다 앞서고 있다면 당연히 다른 많은 과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클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 서방은 소련의 위협이 상상이상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
미심적어하면서도 인공위성 발사를 허락하였지만 핵폭탄을 뉴욕에 던져버린 것 이상으로 서방이 엄청난 혼란에 빠지자 흐루시초프는 인공위성이 체제 선전에 엄청난 수단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신이 난 소련은 대서방 정치 공세를 더욱 강화하여 미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역사적으로 소련이라는 나라가 지구상에 등장하여 가장 강력하게 서방을 압박한 시기가 도래한 것이었다.
[ 흐루시초프는 서방에 대한 선전 공세를 강화하였다 ]
그런데 R-7 로켓이 세계 최초의 ICBM과 인공위성 발사체라는 영광을 얻었지만 군부의 기대와 달리 무기로써의 능력은 낙제점에 가까웠다. 엄밀히 말해 무기로써의 가치가 없었다. 우선 연료를 주입하는데 거의 20시간 정도가 걸렸고 주입 완료 후 로켓의 부식 위험 때문에 24시간 내 발사를 해야 했다. 이것은 상시 즉응 태세를 가져야 하는 전략 핵 투발 수단으로써는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 사실 R-7은 무기로써 적합한 로켓은 아니었다 ]
거기에다가 대규모의 발사대를 비롯한 발사 관련 부수 장비가 너무 많아서 은밀성과 이동성에 많은 제한을 받았다. 당시의 조기경보시스템 수준을 고려하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의 장거리 핵미사일이 사이로나 이동 장비 또는 잠수함 등에 탑재되어 은밀성을 보장받고 즉시 발사할 수 있는 무기 체계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R-7은 ICBM으로써 부적합한 로켓이었다.
[ 전략 무기는 장기 보관 능력과 더불어 즉응성과 은밀성을 필요로 한다 ]
이런 점 때문에 개발 초기에 실수요자인 소련의 군 정책담당자들은 ICBM이 운용에 제한이 많다보니 정작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다. 오히려 미국이 보유한 것과 같은 장거리 중폭격기를 벤치마킹하여야할 효과적인 전략병기로 여기고 있었다. 즉 장거리 미사일의 필요성을 느끼기는 하였지만 당장 필요한 무기를 선호하던 군부는 개발에 최우선 순위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 소련 군부도 R-7이 무기로써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
더구나 엔진 문제로 난산 끝에 개발된 R-7가 최초의 ICBM이라는 선전에도 불구하고 서방측의 반응이 별로 없자 소련 군부는 단지 이를 입증하기 위해 당시에 군사적 용도가 무의미한 인공위성을 굳이 쏘아 올릴 필요까지 있겠느냐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였다. 그들은 코롤레프가 무기로써 적절치 않은 R-7을 만든 것은 결국 자신의 과학적 야심을 채우기 위한 의도 때문이 아니었냐고 분석하고 있었다.
[ 1920년대 로켓차를 실험하던 코롤레프(中) ]
하지만 스푸트니크 1호의 성공은 쇼크라는 말로 표현 될 정도로 미국과 서방을 얼어붙게 만들었는데 이러한 효과는 그 이전에 소련이 서방을 향하여 어떠한 선전과 협박을 통해서도 얻지 못하였던 의외의 결과였다. 즉 실제 성능과 상관없이 ICBM을 소련이 보유하였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냉전의 주도권을 소련이 행사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제부터 막강한 소련 군부도 코롤레프의 행보에 감히 브레이크를 걸 수 없게 되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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