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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특집 시리즈 -2] 北의 뻔뻔한 억지“억류한 국군 포로는 한 명도 없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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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특집 시리즈 -2]

北의 뻔뻔한 억지 “억류한 국군 포로는 한 명도 없다?” -3-


그러면 북한군에 끌려간 국군 포로들은 어떻게 생활했을까?

여기에 대해서 자료가 얻기 힘들다. 그러나 내가 만난 한 북한군 출신 노인 분의 증언을 통해서 어쩔 수없이 살기 위해서 북한군에 편입한 국군 포로들이 북한군에서 어떻게 생활했었고 휴전 후 그 유용 가치가 다한 국군 포로들이 어떤 방식으로 처분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나는 10여 년 전 중국 백두산에 갔다가 호랑이 포수 최석도 씨를 만나는 기회가 있었다. 이 분이 들려주는 사냥 이야기들이 하도 재미있어서 이 집에서 며칠을 머물렀었는데 최석도 씨는 자기가 6.25 전쟁 때 북한군으로서 참전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해주며 북한군의 참전 제대자에게 나누어 주는 군공(軍功) 메달을 보여주었다. 



백두산 호랑이 포수 최석도씨


그는 처자식이 있는 30살에 북한 군에 징집되어 갔었다. 전선에서 전투도 한 것 같았지만 그 이야기는 생략하고 청진 부근의 한 철도 감시소에서 초소장을 했었다는 이야기만 해준다.. 


당시 동해안 철도는 항공 공격뿐만 아니라 미 해군 함포의 포격도 자주 받았었는데 이곳 초소에 억지로 북한군이 된 국군 포로 네 명이 배치되어 왔었다. 


최 포수는 이들이 휴전되기 몇 개월 전에 배치되어 왔다는 것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북한은 국군 포로를 북한군으로 편입하는 작업을 휴전을 바로 앞에 둘 때까지 계속했다고 하겠다. 전쟁 3년간 죽음의 상황에 빠뜨려놓고 유인해간 포로들이 도대체 얼마나 될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실은 또한 한국이 주장하는 억류 포로 1 만 명설이 타탕성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기도 한다. 


최석도 씨가 기억하는 국국 포로의 호칭은 더 이상 해방 전사니 뭐니 하는 그런 달짝지근한 것이 아니라 멸시가 담긴 ‘포로병’이었다. 


그들 네 명의 포로병은 초소장 최석도 씨와 초소 고참들의 말할 수 없는 골칫거리였다. 아침에 일어나라고 할 때 제대로 안 일어나고 일하라고 할 때 일하지 않고, 하여튼 매사에 비협조적이었다. 고참들이나 최석도 씨가 뭐라고 하면 되바라지게 반항하기 일쑤였다. 소위 말하는 농땡이를 부릴대로 부렸던 것이다.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미 해군의 천지를 뒤흔드는 맹렬한 함포 사격이 있을 때는 참호로 대피한 인민군들은 사색이 다 되어서 벌벌 떠는데 이들 포로병들은 마치 반가운 친척이라도 찾아온양 희희낙락 했었다. 상공에 미군 전투기나 정찰기가 지나가면 전부 대피하는데 이들은 전투기가 보라는 듯이 일부러 느릿느릿 움직였었다. 


포로병들은 죽지 못해서 적군인 북한군에 복무하게 되었지만 그들은 포로가 되면 여건이 허락 하는 한 저항하라는 국군의 명령에 충실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이렇게 힘든 세월을 보내고 나면 전쟁이 끝나고 집에 

갈 수 있다고 믿었을 가능성도 없다고는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최석도 씨에게 얄미운 짓만 계속해대던 포로병들중에 병덕이라는 이름의 국군 포로가 한 명 있었다. 최석도씨는 그런 중에도 그와 정이 들어서 친형제와 같이 지냈었다. 서로 배치를 받고 헤어질 때 그는 최석도 씨의 수첩에 석별의 정을 적어 남겼었다. 그 수첩을 중국에서 가져왔던 나는 이 이야기를 내 블로그에 소개했는데 이 블로그 글이 계기가 되어 그의 이야기가 KBS 일요 스페셜에 소개되었었다.



국군 포로의 전별사가 적힌 인민군 수첩 – 현재 전쟁 기념관에서 보관


연로한 최석도 씨의 기억이 온전치를 못했고 시간에 쫓겨 한국내 병덕 씨의 신원 확인을 하지 못했다.

작은 사례지만 북한군에 강제 편입된 국국 포로들의 전군적인 복무 태도가 어쨌다는 것을 이로서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가 있으리라.


북한 당국은 이들을 비밀리에 지켜보고서 농땡이 짓에 대해서 벼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전쟁은 끝이 났고 골치 아픈 포로병들도 처리해버릴 때가 왔다. 


농땡이로 저항했던 세 명의 포로병이 쫓겨 간 곳은 아오지 탄광과 온성 탄광이었다. 그러나 포로 병중에 한 명은 초소장 최석도 씨와 함께 평양 방적 공장으로 배치를 받았다. 최석도 씨와 평양 공장으로 보내진 장 모라는 사람은 한국군에 입대하기 전 서울에서 장사도 했었고 뒷골목에서 놀아보기도 한, 그러니까 물정을 아는 사람이었다. 


눈치가 빠른 그는 매사에 고분고분하게 굴며 열심히 하는 체해서 아오지로 보내지지 않고 평양 방적 공장으로 보내졌지만 그의 내심은 그렇지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평양에서 다시 재혼도 했는데 최석도 씨와 술을 마실 기회가 있을 때는 울면서 속내를 털어 놨다는 것이었다. 통일만 되면 새로 얻은 마누라건 뭐건 다 집어 치우고 한국의 본마누라에게 돌아가겠다는 말이었다.


결론으로 이야기하면 국군 포로들은 평생을 최고의 노동 강도와 최악의 노동 환경인 탄광에서 평생 광부로서 살다가 죽어갔다.


나는 몇 년 전 우연히 전철에서 북한을 탈출해서 남한에 와서 살고 있는 탈북 국군 포로를 만났었다.1950년 7월 입대해서 다음해 2월 포로가 되어 60년 넘게 북에서 살다가 탈출한 김진수 씨라는 분이었다.


이 분의 비참함은 일반 포로들보다도 더했다. 그는 포로가 되어 북한군에 강제 편입된 뒤에 집단으로 탈출하다가 붙잡혀서 탈출자 전원이 총살형 등의 중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어리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지 않고 20년이란 긴 세월을 교화소에서 복무하고 아오지 탄광으로 보내진 비참한 과거가 있었다. 



김진수씨


김진수 씨는 한 마디로 이야기 한다.

“오늘날 북한의 탄광들은 모두가 국군 포로들이 흘린 피와 땀으로 일구어 놓은 것이라는 것이다“라고



40년의 강제노동에 만신창이가 된 김진수씨 손 


힘든 탄광 일만이 김일성 집단이 국군 포로들에게 씌워 놓은 비참한 운명의 멍에가 아니었다. 국군 포로 출신이란 북한 사회에서 시궁창을 들락거리는 쥐만큼도 대접을 못 받는 존재였다.


북한에서 국군 포로란, 인종 차별이 심했던 미국에서의 흑인이나 조선시대의 세습 노비, 그리고 인도의 불가촉(不可觸) 천민[수드라 계급]들의 그것과 비슷한 존재였다. 


자식들이 당에 입당하는 것이나 공무원이 되는 것도 불가능 했던 것은 기본이었다. 국군 포로들은 북한 사회 일반에서 받는 멸시와 천대, 그리고 감시를 매일매일 고달픈 삶의 모서리마다 살 떨리게 당해야 했다.

 

주변 이웃도 국군 포로들을 사람 취급을 안 했고 탄광의 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군청 같은 곳이나 내무서 같은 관청에 일이 있어 찾아 가면 먼저 경멸의 태도를 노골적으로 내보이고 일을 시작했다.


괜찮은 집안에서 태어나 좋게 자라고 교육도 잘 받은 출신도 많았었던 국군 포로들에게 이런 천대와 모욕은 참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비인간적인 대접에 국군 포로들은 적개심은 극에 달했다. 1960년대 북한 최대의 탄광인 아오지 탄광에서 대저항의 폭발이 일어났다.아오지 탄광의 국군 포로들은 인간적인 천대에 보복할 모의를 했다. 목표는 자신들을 멸시하고 괴롭히는 악질 탄광 간부들이었다. 


김진수 씨 표현에 의하면 국군 포로들은 “너 이 새끼들! 한 번 죽어 봐라!”라고 결행했다고 했다. 국군 포로들은 발파용 폭약을 모아서 몰래 아오지 탄광의 주요 갱도에 설치하고 폭파시켰다. 이 폭파로 탄광 간부 포함해서 무려 백여 명이 죽었다. 


국군 포로들이 적국인 북한의 아오지 탄광에서 펼친 저항 운동은 비통한 결말을 맺었다. 놀란 북한 당국은 보위부 안전원을 동원하여 철저한 수색에 들어갔다. 결국 폭파를 모의했던 국군 포로 광부 45명이 체포되고 재판을 거쳐 전원 총살당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북한에 의해서 강제로 납북된 국군 포로들은 그저 수형 생활만 한 것이 아니라 앞에서 이야기 한 대로 북한에 격렬히 저항했었다. 국군 장병으로서 할 바를 한 것이었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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