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 감동이야기]보물을 그리는 아이
지난 2014년 말 국방부에서는 국군 장병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국군 감동 이야기 공모전’을 진행했습니다. 한 달 여에 걸친 접수 기간 동안 다양한 이야기들이 답지했는데요. 국방부 블로그 ‘동고동락’에서는 이들 사연을 정기 연재를 통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 첫 번째 이야기는 대상 수상작 ‘보물을 그리는 아이’입니다.
* 수상자의 작품을 칼럼 형식에 맞도록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보물을 그리는 아이
글 권용훈 (육군학생군사학교, 대위)
보물찾기를 시작한 영원이와의 만남
2012년 4월 15일 중대장 교육을 마치고 부임한 부대는 경기도 연천에 위치한 5사단 GOP였다. ‘1차 중대장으로 어떻게 부대원들과 임무수행을 해야 될까?’ 하는 고민과 걱정을 갖고 부대를 찾아갔다. 부임 전 부대원들의 신상부터 꼼꼼하게 확인했다. 나와 같이 근무하게 될 부대원들의 모습이 궁금했고 이들을 만날 기대에 가슴 설렜다. 경계부대 특성상 많은 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신병들의 전입이 많았다. 그렇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2012년 5월 중순경 키 164cm, 몸무게 58kg에 왜소한 체격, 말수도 적고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병사 한명이 전입을 왔다. 그때가 처음 영원이를 만나게 된 날이었다.
영원이는 내가 하는 질문에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자신감 없는 말투로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리곤 했다. ‘이 친구가 GOP 경계근무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의구심까지 들 정도였다. “영원아, 너 제일 좋아 하는 게 뭐야?” 속삭이듯이 나에게 영원이가 입을 열었다.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합니다.” “너 GOP에서는 경계근무 투입되는 시간이 많아서 그림 그리고 할 시간이 부족할텐데......” “그래도 시간이 허락된다면 그려보고 싶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했다. 전입 후 나눈 대화 중 가장 분명하게 나에게 건넨 말이었다.
신체적 능력, 체력, 성격 모든 면에서 부족했지만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서는 아주 정확하게 의사표현을 했다. 하지만 나는 영원이를 믿지 못했다. 뒤처지는 체력과 왜소한 체구로 경계근무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에 나는 중대본부에서 그를 통신병 임무를 수행하도록 보직을 조정했다. 이후 두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영원이도 부대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영원이의 보물찾기
어느날 영원이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중대장님 저도 다른 동기처럼 경계근무에 투입되고 싶습니다.” “왜? 중대본부에서 생활하는 게 불편하니?” “아닙니다. 다른 동기들과 같이 근무에 투입 되고 싶고 저 자신을 이겨내 보고 싶습니다.”
마음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영원이의 강렬한 눈빛과 자신감을 보고 이를 허락해주었다. 그렇게 영원이는 근무에 투입이 되었다. 영원이는 하루에 12시간 근무라는 고단한 일과를 생각보다 잘 견디어내고 있었다. 따뜻한 봄, 한없이 뜨겁던 여름이 지나고 어느덧 가을이 왔다. 영원이는 내 걱정과는 달리 부대에 적응을 잘 하고 말도 곧잘 했다.
하루는 소초 순찰 간 생활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를 보았다. 영원이는 A4용지에 연필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영원아 그림 좀 보여줄 수 있어?” “예, 아직 완성은 못했는데 보여드리겠습니다.” 자신이 속해있는 소대원들과 함께 생활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그린 그림이었다. “너 이거 얼마동안 그린거야?” “부대에 전입 온 날부터 조금씩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영원이가 그린 그림에는 봄, 여름, 가을을 보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그렇게 영원이는 자신의 꿈을 위해서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쁜 임무 수행으로 휴식시간마저 부족했을 텐데 자신의 꿈을 접지 않고 이어 나가는 모습이 너무 대견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영원이가 그림을 자유롭게 그릴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숨겨진 보물을 찾기 위한 도움
2013년 1월 GOP경계근무 임무수행을 마치고 우리부대는 *FEBA 지역으로 철수 했다. FEBA에서도 GOP에서처럼 바쁜 일과를 보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영원이가 속해있는 소대의 소대장이 영원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중대장님 영원이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데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물감과 붓 살 돈이 없어서 고민하는 것 같습니다.”라는 이야기였다.
120명의 중대원 중 1명의 문제였지만 우리 중대 간부들은 그동안 성실히 임무를 수행한 영원이에게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한 간부가 “우리가 조금씩 돈을 모아서 영원이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줍시다.”라며 말을 꺼냈고 그 한마디에 간부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돈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인 50만원으로 영원이가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물감과 붓, 스케치북을 구매해주었다. 행정보급관은 영원이를 위해서 그리 좋진 않아도 편안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작은 창고까지 마련해 주었다.
주말, 자유시간이면 영원이는 그 창고에서 항상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중대원들도 모아서 미술동아리 활동까지 했다. 비록 좋진 않아도 그런 환경은 영원이에게 우리 중대 간부들이 해줄 수 있는 소박한 선물이었고, 그런 배려를 영원이는 기쁘게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해 자신이 숨겨둔 보물을 찾아가고 있었다. 누군가 숨겨 놓은 것이 아닌 본인이 본래 지니고 있던 재능을 살려가는 영원이의 모습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 Forward Edge of Battle Area : ‘전투 지역 전단’이라 부르는 최전방 한계선. (편집자 주)
보물을 찾기 위한 그만의 아름다운 노력
2013년 5월 어느 날 영원이가 나를 찾아와서 호국미술대전에 참가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를 흔쾌히 허락해주었고 영원이는 자신의 그림을 출품했다. 2013년 9월 17일 호국미술대전 발표날, 기대감에 부푼 마음을 안고 입상자 명단을 확인했다. 명단에는 영원이의 이름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찌나 행복했던지 중대 행정반이 떠나갈 듯 큰 목소리로 영원이를 불렀다. 비록 최우수상은 아니었지만 최선을 다해 그린 그의 그림이 입선이라는 성과를 낸 것이다. 영원이도 나도 정말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날 하루 우리 중대는 영원이를 위해 조촐한 파티를 마련했다. 비록 피자와 통닭뿐이지만 중대원들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원이는 2013년 10월 8일 용산전쟁기념관에서 열린 미술대전에 참가했고 육군참모총장 표장을 받았다. 영원이는 표창장과 자신의 그림을 찍은 사진을 가져와 내게 보여줬다. 중대원들은 처음 보는 육군참모총장 표창장을 만져보면서 영원이의 노력에 찬사를 보냈다.
영원이의 노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부여된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꾸준히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 했다. 물감이 부족해 그림을 그리기 힘들면 중대 작업 후 남은 페인트를 찾아서 그리기도 했고 붓이 굳어서 사용하지 못하게 되면 페인트용 붓을 사용하기도 했다. 영원이는 그렇게 자신의 보물과 꿈을 위해서 포기하지 않았다. 그 노력 덕분에 그는 전역 전까지 미술공모전에 두 번이나 더 자신의 그림을 더 출품할 수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영원이의 보물찾기
어느덧 전역을 앞두게 된 영원이는 전역 전 중대원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중대에 선물했다. 전역 후 영원이는 집안 사정으로 생활이 어려웠지만 그림을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다. 그는 주간에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야간에는 미술학원에서 미술강사로 일했다. 주말에는 길거리 화가로까지 나서고 있다. 그는 여전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그림에 대한 강한 열정은 식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어떻게든 자신의 보물과 꿈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군대를 사회와 꿈의 단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원이는 이러한 편견을 깨고 군 생활을 통해 자신의 꿈을 키워냈다. 장소와 환경은 자신의 꿈과 목표가 정확하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영원이는 명확하게 보여준 것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보물로 재능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비록 보물이 숨겨져 있는 걸 눈치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찾아야하는 것인지 깨닫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영원이는 자신의 재능을 알고 있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살려야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지금은 현실이라는 장벽에 부딪쳐 먼 길을 돌아가고 있지만 결코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자신만의 보물을 찾아가고 있는 영원이의 모습에 겸손한 인사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