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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특집 시리즈 -2] 北의 뻔뻔한 억지 “억류한 국군 포로는 한 명도 없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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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특집 시리즈 -2]

北의 뻔뻔한 억지 “억류한 국군 포로는 한 명도 없다?” -4-


이 대형 사건이 있고 나서 얼마 안 되어 김일성이 아오지 탄광에 왔었다.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던 김일성은 책임자에게 광부들의 대우도 개선해주고 그 중에서도 특히 먹는 것만은 조종사 수준으로 해주라고 지시를 했고  그대로 시행되었다. 


김일성 영화의 현지지도 모습

 김 일성은 북한 전역을 돌아다니며 현지 지도라는 이름으로 통치력을 강화하고 

선심을 남발하여 인기 관리를 하였다.



물론 이런 후대(厚待)는 북한의 경제 사정이 좋았던 80년대까지였다. 90년대 들어와서 배급이 조금씩 줄어들고 드물어지더니 돼지고기는 커녕 기본적인 쌀이나 옥수수마저도 배급이 끊어졌다.. 


김진수 씨는 북한 사회에서 겪는 인간적인 모멸감도 모멸감이었지만 안전원들에 의한 밤낮을 가리지 않는 감시 역시 국군 포로들을 괴롭게 만든 것이었다고 했다. 


개인 이력부가 치밀하게 작성되어 있어서 국군 포로들의 일거수[一擧手 一投足]이 모두 기록되었다. 그 뿐인가.... 3호 연호제, 5인 연호제등이 있어서 정보원들이 모든 주민의 정보를 내무서에 보고하게 되어있다. 그런 보고 체계는 치밀하게 되어 있어서 100호 촌락이라면 20여 호는 그런 내무서의 연락망원으로 보면 되었다. 



북한의 포로 학대는 전쟁 초기부터 시작되었었다. 

서울 시내에서 ‘조리 돌림’의 굴욕을 당하고 있는 미군 포로들


교화소에서 20년간의 끔찍한 고통을 겪었던 김진수 씨는 이런 비밀경찰의 체제에서 극도의 말조심을 했다. 그는 친한 친구와도 정치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었고 주로 먹는 이야기만 했었다. 



이와 같은 지독한 감시 체제는 80년대가 되고 포로들이 나이를 먹고 그 곳에서 자식도 낳고 적응해가는 듯하자 완화되었다. 김진수 씨는 40년이 넘게 수모와 괴롬을 당하다가 그의 나이 60세에 정년 퇴직을 했다. 북한 공산정권에게 40년을 넘게 당하던 착취와 박해에서 해방된 것이다. 정년 퇴직 후에 김진수씨에게는 연금이나 무슨 보상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남한의 자유민을 강제로 북한 주민으로 만들어서 죽을 정도로 부려 먹고 노동력이 없어지자 내쫓은 북한 정권은 내 알 바 없으니 이제 늙은이들이 알아서 벌어 먹고 살라는 철면피 같은 통지를 하고 인간 폐기를 해버린 것이라고 하겠다. 

  

은퇴 후에 김진수 씨는 북한 전역을 덮친 식량난에 봉착했다. 김진수 씨는 깊은 산속에 옥수수 밭을 일구고 부인은 옥수수로 밀주를 담가 팔면서 호구지책으로 삶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동료 포로로부터 소개받은 중국 동포를 통해 고향의 형제들과 연결이 되어 북한을 탈출하였다. 


북한의 김씨 일족은 인륜(人倫)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대형 범죄를 여러 번 저질렀었다. 공포에 휩싸인 국군 포로를 북한군에 편입시켜 학대하고 소용이 없어지자 모두 탄광으로 보내 혹사시키며 북한 최저의 계급으로 천대하게 만든 것은 그 중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범죄다.


북한의 포로 수용소에서 고생하다가 죽어갔던 국군 포로들을 보니 북한군과 중공군들이 남한 포로 수용소에서 누렸던 호강스런 생활과 크게 비교가 된다. 순진한 미군의 관할에 있었던 거제도 공산군 포로들이 먹었던 그 급식은 전방에서 싸우던 국군보다 더 나았다고 알려져 있다. 수용소에는 그들을 위한 전용 병원까지도 있었다. 



김일성 스탈린의 초상화를 걸고 시위하는 북한군 포로들


상당수 공산 포로들은 전선에서 총탄에 맞아 죽느니 수용소에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있는 것을 자기 복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북한 포로들은 그런 호강이 지나쳐서 인공기를 게양하고 적기가를 부르며 포로 수용소장 도드 준장을 납치하기도 하는 반란 수준의 폭동까지 일으키기도 했다. 


다 배가 불러서 해댄 짓이었다. 앞서 박진홍 선생이 기술했었던 벽동 포로 수용소와 얼마나 대조되는 모습인지 누구나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되풀이 강조하지만 일 만 명 넘게 구금하고 있다고 믿어지는 국군 포로들은 엉클 톰스 캐빈에 나오는 흑인 노예와 같은 생활로서 비참한 삶을 살다가 현재는 대다수가 저 세상으로 떠났다.


스토우 부인이 썼던 엉클 톰스 캐빈 –남북 전쟁의 한 밑거름이 되기도 하였다.


최석도 씨는 나와 대화하는 동안 북한을 비난하는 것은 조심스럽게 자제했었다. 전편에서 밝힌바대로 북한군에서 제대했을 때 김 일성에게 받은 색바랜 군공(軍功) 메달을 보여주며 은근한 자랑까지 했었다. 젊은 시절 인민군 생활에 대한 강한 노스탤지어를 가진 듯했다. 


그러나 병덕 씨의 이야기를 하면서는 그는 김일성 집단을 맹비난했다. 전쟁이 끝났으면 포로를 석방하는 것이 도리인데 왜 보내지 않고 지옥살이를 시키느냐는 것이다. 

“ 죄도 없는 사람을 어찌 가족과 생이별로 갈라 놓고서리 탄광에 보내서 인생을 망쳐 놓습니까? 이것이 인간이 할 짓입니까?” 

그는 기어이 눈에 고이는 물기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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